그림처럼 아름답게 뻗어 내린 이 금수강산 우리의 조상은 여기 이 강산에 긴 역사를 창조해 왔고 또 이어 왔습니다. 민족이 격은 불안과 영광속에서 시작한 불안이 성장으로 변하고 그 길이를 통일신라의 성전고가 울리고 이조 500년의 태평가가, 일제의 군화소리가 붉은 마수의 탱크소리가 여러 번이나 지나간 우리의 애환을 실은 이 길들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나아있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이제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나 헐헐 털고 힘차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60년대가 가고 이제 70년대를 맞는 우리의 경제건설은 현대적인 산업국가로서 힘찬 전진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특히 양차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공업한국의 기반을 굳게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동안 많은 외화를 들여 수입해 오던 여러 가지 상품들이 우리의 손으로 생산하게 되고 오히려 세계 시장으로 수출까지 하게 되어 막대한 외화를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수출증대는 번영의 내일을 기약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립경제를 성취해야하는 70년대는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를 훨씬 넘어야하고 수출은 적어도 50억달러 선을 돌파해야 합니다. 성장한 어른에게 어릴 때 옷이 맞지 않는 것과 같이 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소생시간의 협조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산업도로의 고속화가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어 역사적인 대망의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된 것입니다. 박대통령께서는 역사를 스스로 창조하는 민족대열의 앞장에 서서 고속도로의 기본 계획을 짜게 했으며 노선변경에는 20여 차례나 현지를 답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67년에는 서울-인천간 고속도로가 착공 개통되었으며 기관고속도로 추진위원회와 고속도로 건설단을 구비해서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 건설의 기본계획을 짜게 되었고 건설공사 사무소의 발족과 더불어 1968년 2월1일에 역사적인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건설의 기공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화면에서 본 이 장면은 사상최대의 건설공사이며 순전히 우리의 기술진으로 추진되는 이 고속도로건설은 그 무한한 개발효과를 적기에 발휘하도록 공사를 3년 내로 단축했으며 이러한 공사계획은 세계 각국을 놀라게 할 만큼 순조롭게 추진되어 갔습니다. 폭이 100미터가 넘는 4차선의 장대교만도 29개소에 300개가 넘는 작은 교량을 합치면 교량의 연장길이는 17킬로미터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곡에 걸쳐지는 아름다운 물결의 모습도 장관을 이룹니다. 소백산맥의 주머니를 뚫는 510미터의 방제터널을 비롯해서 대소통의 6개의 길이는 약 2킬로미터나 되며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한단면식 최신공법을 쓰고 장도길이를 가열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에는 많은 육교가 가설되어 그야말로 논스톱의 고속도로의 면모를 갖추고 있으며 468개 농로와 1,455개의 수로가 개설되었습니다. 또한 농촌과 도시 사이의 소득격차를 없애기 위해서 고속도로 주변에는 많은 내륙공업단지를 만들어서 농공병진의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풍요한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의 오늘은 공업단지 외에도 많은 관광단지가 인터체인지를 연결하기도 합니다. 주요 도시가 교통거점을 연결하는 18개소의 인터체인지는 자연과 인공의 아름다운미를자랑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싸움에서 겪어야 하는 큰 시련은 물이라 하겠습니다. 특히 공사가 절정에 이른 69년에는 하늘이 우리를 시험하는 양 많은 비가 왔습니다. 때 아닌 자연의 홍수로 공사가 피해를 입었고 7,8월에 걸친 집요한호우의 연속은 공사의 진전을 크게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9월에 그 혹시나 했던 충남폭우는 공사 당사자들의 쓰라린 추억이 될 것입니다. 이 고속도로 노면에 들어가는 임야나 전답은 모두 630만평에 달하지만 국민의 한결같은 이해와 협조는 내일의 밝은 조국을 믿는 의지의 발로라 하겠습니다. 이 거대한 건설공사의 이면에는 공사의 흙과 모래에서부터 자연자재에 이르는 은밀한 사전 조사 실험과 과학적인 기구를 가진 25개소의 시험실 그리고 이동 시험소에서 시공관리에 묵묵히 종사하는 수백 명 시험요원의 헌신과 노고를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정부는 물샐틈없는 계획과 지원태세로 공사를 지도하고 업자도 이해를 초월해서 빠른 시일 내에 값싸고 튼튼한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서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이 사업에 정열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1969년 12월29일 대구 부산 간 129킬로미터와 언양 울산 간 15킬로미터의 노선이 개통을 봄으로서 지난해 봇짐으로 천리를 걸어야 했던 동래 한양 천릿길이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생활권으로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 길에서 부은 수송력의 확대로 경제발전의 큰 이득을 가져올 것은 물론 풍요한 내일의 농촌을 건설하는 새로운 대동맥이 되며 일면 건설 일면 국방으로 우리는 통일을 향한 힘찬 구보를 내디디게 된 것입니다. 박대통령께서는 이날 부산 시민대회에서 치사를 통해 고속도로의 의의를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앞으로 한 5, 6년 후가되면 장차 (뭉개짐) 우리나라에서 외국에 수출하는 물자가 (뭉개짐) 물자는 우리나라에서 생산을 해서 외국에 수출할 때에 또한 편안한 그에 상당한 물자가 외국에서 들어오게 됩니다. 69년에 약 60억불내지 70억불에 해당하는 물자가 우리나라에 팔도와 어로와 항만을 통해서 외국으로 나가고 들어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자들이 원활하게 도시에서 농촌 농촌에서 도시 농촌과 도시가 빠른 시일 내에 수송이 되는 그런 체계가 지금부터 아시아의 관문 우리나라의 산업이 근대국가의 산업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에 오늘날 이 고속도로가 오늘 우리나라의 발전에 얼마든지 월등히 기여를 할 것이다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짐작이 가능할 것입니다.” 1968년 12월에 서울에서 대전까지 총 153킬로미터가 착공되었으며 대구 부산 간 132킬로미터 중 124킬로미터와 언양 울산 간 15킬로미터가 12월말에 개통되었고 나머지 난공구간은 대전 대구사이 143킬러미터가 1970년 6월말개통을 목표로 공사가 활발히 진척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70년 4월부터는 호남선과 영동선도 착공될 것이며 계속해서 기관고속도로망의 건설과 일반 국도의 개량도 축조하도록 강력한 계획에 추진 중에 있습니다. 순전히 우리의 기술지진으로 그리고 순전히 우리의 돈으로 가장 싼 값으로 불과 2년 반 만에 건설한 이 길을 우리가잘 활용함으로서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게 복된 삶을 가져다주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