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면에 사는 이석걸이라는 사람입니다.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열중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이렇게 다쳤습니다. 오토바이 사고로 병상에서 한가한 시간을 갖게 되니 자연 지난 1년간의 일들이 생각됩니다. 오늘은 문성동에나 가봐야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기계면 문성동 새마을사업, 오토바이 사고 등 지난 일을 차분하게 반성하며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지난 1971년 7월 31일 영광스런 대통령포장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사업을 앞장서서 해낸 문성동 동장 홍성태 씨도 대통령포장을 받았습니다. 나는 바로 1년 전까지 만도 저러한 농가에서 말하기조차 쑥스런 생활에 몰두해 있었습니다. 보통 사흘 밤쯤 새우며 요행의 수나 바라는 도박생활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같이 도박하던 농민들도 1년에 3개월 일하고 남은 세월은 도박으로 소일했습니다. 기왕에 못 사는 농촌살림. 집안일이야 어찌됐든 술이나 먹고 노름이나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허송세월만 보낸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거 문성동은 경상북도 내에서도 제일 못 살았던 부락으로 86호 농가가 호당 이천여 평의 천수답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그나마 1967년엔 극심한 한발로 86 세대 중 18세대나 집단으로 마을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는 처참한 경우가 생겼습니다. 허탈감에 빠진 부락민은 이농민이 마을을 떠나도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뒷전에서 눈물만 흘렸을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내 성격은 옆에 사람이 죽어도 돌아보지 않고 더욱이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봤습니다. 그런 생활에 젖어있던 차에 그러니까 1970년 10월, 내 마음이 바뀌는 동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면장님이 몇 번 집에 가도 없었다면서 마침 이발소에 있던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불쑥 기계면을 대표해서 앞서가는 마을 시찰대표단으로 선진부락을 다녀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를 놀리는가 싶어 거절했습니다. 노름꾼인 내가 부락대표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한사코 권했습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최대의 악인은 최대의 선인도 될 수 있다고, 노름에 집념하는 성격이 어떤 동기로 바뀌면 옳은 일에도 남보다 앞설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모든 사람의 반대를 뿌리치고 나를 추천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표까지 사와서 나는 바람이나 쐬고 오겠다는 가벼운 기분으로 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차 목적지는 청도군 신도1리 였습니다. 이곳에 도착하자 나에겐 얘기치 못했던 일이 생겼습니다. 부락민이 전부 동원되어 우리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나의 일행은 자기 부락 발전에 공이 큰 사람들이지만 나는 환대 받을 하등의 자격도 없는 노름꾼에 불과합니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런 환대를 받는가. 멍멍해서 박수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남 앞에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나는 나의 지난 일을 깊이 되새겨보게 됐습니다. 나만을 위한 생활, 나 혼자만의 쾌락. 이것이 진정 내가 참 되게 사는 보람이었는지 부락민의 박수소리가 마음속을 도려내는 것 같았습니다. 태양이 두려워 새벽에 노름방을 나서던 나. 이곳에서 나는 평생 처음 태양을 향해 참회의 눈물을 흘려봤습니다. 나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부락 구석구석을 살펴봤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내 고장에 돌아가면 내 부락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며 하다못해 담장 모서리까지 놓치지 않고 기억에 담아 놨습니다. 내가 청도를 다녀온 후 나의 권유로 기계면 합동 대표 145명도 다시 청도군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보고 온 소감의 얘기를 꽃피우며 기계면 내 동장들 중심으로 새마을가꾸기자체추진협의회를 구성하고 앞장서자, 의존하지 말자, 도박하지 말자는 구호를 내걸고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아직 도박하고 싶은 마음의 미련은 가시지 않았나 봅니다. 나도 모르게 행해지는 이 손장난. 손목이라도 잘라버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도박풍조를 없애고자 부락을 다니면서 화투를 모아 화형식을 했습니다. 새마을 사업이 정말 잘될까? 동민이 호응해줄까? 성공할까? 제발 이 불길같이 우리가 할 일도 한 없이 번져나가기를 나는 마음 깊이 빌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큰 기대를 안고 면장님과 함께 면내에서 제일 희망적인 부락을 택해 설득의 길을 나섰습니다. 부락회의를 열고 열심히 부락민을 설득했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나 설득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첫째 부락에서의 설득은 실패했습니다. 나와 면장님의 실망은 컸습니다. 실망을 말자. 또 다른 부락을 찾아보자. 어디가 좋을까? 나는 그때 문성동과 동장 홍선표 씨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와는 친구였고 그는 설득력 있는 동장이었습니다. "여러분 움직여봅시다. 움직이면 뭔가 생깁니다. 남을 위해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부락을 내가 개발하면 우리가 잘살게 되지 않습니까?" 동장 홍선표 씨의 호소에 그 반응은 비교적 좋았습니다. 동장과 나는 부락민의 반응에 힘입어 우선 농로, 차도를 내게 될 현지를 돌아보며 사업계획을 만들었습니다. 첫 사업은 지게를 지고 겨우 다니던 농로 1,800m를 5m폭으로 넓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길로 편입되는 농토의 주인은 한사코 농로확장에 반대했습니다. 이때 동장이 동민에게 당한 수모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악몽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나와 동장은 동민에게 엎드려 빌다시피 한 사람 한 사람씩 꾸준히 설득을 계속했습니다. 마지막엔 길로 편입되는 농토의 명세를 적었습니다. 그리고 부락유지 홍순락 씨가 자기 땅 200평을, 동장이 10여만 원에 해당하는 150평의 땅을 희사하고 설득하자 한 사람 한 사람씩 땅을 내놓아, 농토 750평을 아무 보상 없이 부락을 위해 희사 받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