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도 우리나라 사람이 살까하고 갸우뚱해보는 세계지도 속의 그 곳. 그 중의 하나가 열정적인 중남미 대륙이다. 전체 해외동포의 약 2%인 9만여 명이 살고 있는 곳, 중남미로의 이민은 하와이 농업 이민이 시작되던 19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1,031명의 멕시코 이민이 그 시초가 되었다. 노동력이 부족했던 중남미로 이민 가는 일본인들 속에 소수 한인이 섞인 형태였다. 1953년 휴전이 되고 반공포로 60여명이 남미 국가로 이주했다. 한민족이 처음으로 남미 땅에 둥지를 튼 것이다. 빈털터리로 출발했던 이들은 2, 3년간의 방황 끝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정착했다. 온갖 고생을 겪은 후에 지금은 대부분 중산층 정도의 생활을 하고 있다. 남미로의 정식 이민은 1960년대 초반부터 정부 주도로 이루어진 집단 농업 이민이 그 시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에 농사 경험이 없는 상태로 도착했던 이들은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바탕으로 오늘 날에는 각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남미의 파리라고도 불리우는 초원의 나라 아르헨티나. 한반도의 반대편 지구의 한쪽 끝에 위치한 이곳은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덮여있다. 이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20여 년 전 쉰 살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 이민을 결심하고 이곳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한 최재학씨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한 때 공무원, 사업가로 일했던 그는 뒷전으로 물러앉을 나이에 이곳에 건너와 스페인어로 큰 거북이라는 뜻에 그란또르 식품점을 차려 제 2의 인생을 출발시켰다. 이제는 3천 평 규모, 하루 3.400명의 소매상이 드나드는 대형 식료품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는 최 씨는 유태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통업계에서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손꼽히는 거상이다. 이곳은 한국인 이민자들이면 누구나 거쳐 가는 109한인거리 109번 버스 종점 부근에 생겨나 자연스럽게 109촌으로 불리우고 있는 이민자들의 제 1차 전진 기지이다. 약국, 미용실, 식당 등의 간판이 우리에게 낯익기만 하다. 여느 이민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식료품 구멍가게로 출발한 최 씨의 이민초기는 고난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식구들 모두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인내와 끈기로 버텨온 그 세월의 깊이만큼 이젠 기반을 잡았다. 오늘은 최 씨 일가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한인 사회의 경사가 난 날이다. 최 씨의 차남 재호 씨가 변호사 자격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지난 8년 동안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델그라드 법대에서 책과 씨름한 끝에 맺은 결실이기에 기쁨의 크기가 더욱 크기만 하다. 모든 가족, 이웃, 거래처의 관계자들까지 마치 내 일처럼 기뻐하며 아르헨티나 식 축하를 나눈다. 이제 최재학씨를 포함한 아르헨티나 동포 사회의 꿈은 오직 하나 바로 2세들을 위한 한국 학교의 설립이다. 2세들이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이 땅에 당당한 주인으로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아르헨티나 동포사회에 생명력이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고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어린 학생들에게 배움을 전하며 그 꿈을 영글게 하고 있다. 이러한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3월 아르헨티나 동포들의 정성과 모국 정부의 지원으로 현대식 3층 건물에 45개의 교실을 갖춘 한국 학교가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날 아르헨티나 동포 사회의 밝은 미래를 향한 문도 무궁화 꽃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활짝 열렸다.

이제 구한서 씨에겐 지난 시절이 아득한 추억으로 떠오릅니다. 29의 나이에 이민선에 올라 감자와 소금으로 배고픔을 달래며 생활했던 그는 지금도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10여 년 전 이미 삼만여 평의 농장을 3년 만에 사들였던 구한서씨. 달걀과 병아리 속에 묻혀 살아온 그의 삶 때문인지 가족들은 그를 병아리 아빠, 병아리 남편으로 부른다. 병아리 감별법을 비롯한 새로운 양계기술의 전파와 근면성으로 파라과이 당국은 한국인에게 깊은 호의를 표시하고 있다. 해마다 9월 25일을 양계의 날로 정하고 이 나라 영계업에 끼친 한국인의 공로를 기리고 있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달걀들을 가지고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가난한 아마추어 축구팀 선수들에게 후원회장이 되어주었던 그는 그 작디작은 달걀에 자신의 삶의 철학인 인내와 희망을 담아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

참으로 막막했던 그 시절 오직 혼자라는 절망감도 그를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힘든 세월을 잘 견뎌 낸 덕분이었을까 그는 브라질 커피의 명산지 로드리나 시에서 최초로 한국인 커피농장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의 집념도 알만하다. 낯익은 벼이삭도 아닌 사과나무도 아닌 열매조차 생소했던 커피농사였지만은 이제는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대농장주가 되었다. 함께 일한 일꾼들의 고마움을 잘 아는 김정안 씨 그들의 낯선 동양의 주인이기보다 정겹고 인간적인 농사꾼이고 싶은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민 초창기 한인촌의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서 한 단계 한 단계 삶의 터전을 넓히는 동안 그에게는 항상 든든한 가족들이 있었다.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모여 담소할 수 있는 기쁨을 준 부인 김용옥 씨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김정안 씨는 그녀와 함께 통과했다. 이들 부부가 아이들에게 느끼는 한 가지 안타까움이 있다. 아이들의 입에서 한국말대신 낯선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개척의 길을 택했던 부모의 선택으로 인해 한민족의 피를 가졌으면서도 일주에 한 번 한글학교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었던 아이들의 꼬레아 외국어가 되어버린 모국어가 아이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은 숙제였다. 이제 김정안씨는 고국을 가슴속에 품은 채 타국 땅에 익숙해지려고 애쓴 꼭 그만큼의 노력으로 아이들의 가슴속에 그들의 조국을 심어주어야 한다. 과거의 시간을 뒤로 하고 앉은 김정안씨 그는 지금 또 다른 도전을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른다.

제3의 고향을 찾아 떠났떤 애니깽 들의 후예들이 지금도 조국을 그리며 살고 있다. 멕시코에서의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쿠바로 이주한 한인들의 생활은 그러나 노예와 같은 생활의 연속일 뿐이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에서도 1921년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해 독립 운동 자금을 보내는 등 조국독립을 위해 힘썼고 그들의 간절했던 염원은 지금도 살아있는 듯하다.

“일본 사람이 같이 있기 싫다고 그래 멕시코로 모두 갔었어요. 저는 멕시코서 났어요. 그러고 나서 8달만에 쿠바로 오셨어요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그래 내 들어와서 셍뜨랑 마나띠 오리엔떼 거기로 와서 거기서 이제 모두 마딴사로 마딴사로 와서 거기 한인농장을 지어서 집을 모두 한인만 살아서 거긴 쿠바사람은 하나도 안 살고 마딴사 살적에 아주 어려웠어. 어저께 농장 거기서 일도 없었어. 그래 하바나로 왔어요. 하바나로 와서 이리 뛰고 힘이 들었어요. 이제 아주 좋습니다. 대단히 좋아요.”

지구 끝에 남태평양에도 한민족은 민들레 홀씨의 그것처럼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계화 시대의 무역 중에는 사랑과 봉사라는 보이지 않는 물건도 있다. 파푸아뉴기니에 우렌다우 마을에서 한국 외방 선교회의 첫 번째 사제 김동기 신부가 했던 무역일이 그것이다. 축복받은 낙원이란 뜻의 파푸아뉴기니 그 곳의 곱슬머리 원주민들 사이에는 늘 그가 있었다. 자연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며 격식과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원주민들 속에서 환자를 돌봐주고 기도해주는 그는 귀한 손님 그 이상의 존재였다. 손수 지은 교회에서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건설하기위해 열심이었던 김 신부. 그는 순박한 원주민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시간 정성스런 기도를 올린다. 때묻지 않은 사람들의 고통을 끌어안기 위해 파견된 한국의 신부들. 10여년이 넘는 그들의 세월 속에 한국 성인의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녀가 한국을 사랑의 나라로 부르며 자라고 있다.

백호주의를 고수하던 나라. 호주는 지구촌에서 시선을 끈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대륙으로 이민의 역사 역시 짧은 나라지만 최근 들어 적지 않은 수의 한인이 퍼져나간 그리 낯설지 않은 나라로 다가오고 있다. 70년대 초 월남의 패망으로 일할 곳을 잃은 수백 명의 파월 기술자들은 때마침 실시된 호주의 비자 간소화 정책으로 새로운 삶을 그 곳에서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 초반까지는 유학생 등이 눌러앉는 형태의 이민이 절반을 차지했다. 그리고 9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이민이 증가해 시드니, 멜버른 등에 삼만육천 명이 거주하며 상업과 무역업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그 곳에 위치한 그림 같은 집에는 주변을 가꾸고 돌보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호주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거리 어느 한편에서 우리 동포들은 언어의 차이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평화로운 공간에서 겪는 초기 이민세대들의 갈등은 그래서 잊기도 쉽지만 그 고요함에 더욱 고향생각에 젖기도 한다. 그 호주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한인작가 한명이 살고 있었다. 호주인의 삶과 사고방식을 누구보다 진솔하게 그려내는 그를 사람들은 사랑한다. 작가 김돈호씨의 작품 세계는 그 폭이 넓고 깊어서 이 곳 현지 비평가의 분석은 그의 작품세계를 다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빈부의 차와 인간의 갈등 그리고 현대사회의 모순을 담담히 그려내는 그의 작품이 나올 때마다 호주인 들은 그를 지켜본다. 문화는 달라도 통하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인간사에 대한 얘기라면은 그것에는 분명 국적을 초월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호주문단에서는 낯설기만 한 한국의 시와 시조 판소리를 소개하며 그는 그렇게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문화를 지구촌의 한켠에서 서로 만나게 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호주인들에게 존경받는 선배가 된 김돈호. 정부로부터 받은 3만 달러의 창작료와 대학원 석사 교재로 사용되는 작품을 가진 그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한국인의 정서가 아닐까. 환태평양의 화산섬 뉴질랜드. 인구 350만 명의 이 나라에 그 동안 한국인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1년 뉴질랜드 정부가 새로운 이민 정책을 시행함에 따라 고학력 젊은 층의 일반 이주가 급증하고 있다. 현재는 7천명을 훨씬 넘는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는데 증가속도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다.

“현재 우리 뉴질랜드 교민들은 근래에 오신 분들이 뉴질랜드 이민 정책상으로 점수이민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 점수가 상당히 높은 점순데 30점 이상인데요. 그래서 학력수준이 대단히 높고요. 또 그와 비례해서 지식수준도 높고 우리 뉴질랜드에서도 지금 한국인에 대한 바라는 Err_Code(17:49) 상당히 얻고 있습니다.”

“컴퓨터 쪽에 뉴질랜드가 전산이 좀 잘 돼있어요. 한국보다 많이 잘 돼 있거든요. 그러니깐 그 쪽을 좀 더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은 한국으로 이렇게 와가지고 이렇게 교류 같은 식으로라도요. 한국에서 한국 사람이니깐 도움이 줄 수 있는 걸 해봤으면 싶어요.”

뉴질랜드 이민자 대부분은 정신적 풍요를 누리고 싶어 이곳에 삶의 둥지를 새로 튼 사람들이다. 아직은 이민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현지에서 탄탄한 뿌리를 내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서로 도우며 성실과 노력으로 연륜을 쌓아갈 때 밝은 미래가 열리게 될 것이다.

새로운 개발과 발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 그래서 지구촌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곳에 우리 한국인이 적지 않은 숫자로 자리하고 있다. 험한 일을 마다않는 한민족의 근성으로 아시아 태평양 개발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 한국인들의 삶과 애환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월남 패망으로 인해 월남에 파견되었던 상사 주재원과 근로자의 또 다른 일부는 가까운 아시아지역으로 뻗어나가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에 분산되어 상업 등에 종사하며 기반을 잡은 데 이어 우리 기업체도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 진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동남아시아의 한국인수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 있었다. 한국의 기업은 동남아시아 주요도시에서 세계적인 건축물을 세우고 현지 공장을 만드는 등 급변하는 아시아의 현대사에 빠질 수 없는 공헌을 했다. 이제 아시아에서 한민족의 위치는 저력 있는 나라로, 선진 기술로 국제화 시대를 준비하는 국가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싱가폴의 선박 수리 업체 오토는 중국과 일본의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로 한국인 서중화씨가 그 경영을 맡고 있다. 한국인 기술자 1명에 제 3국 근로자 한명씩 2인 1조로 구성한 것은 기술 연수는 물론 외국인에게 한국의 근면성까지 전달하고자 한 서중화씨의 아이디어였다. 관습과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한 데 묶어놓은 현장에는 늘 치밀하게 돌아보는 서중화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조선업계의 전체적 불황속에서도 오토의 회의실은 바쁘게 움직인다. 지하철 공사에 대한 회의 때문이다. 조선업에서 더 나가 많은 철재가 필요한 지하철 공사의 사업을 맡은 오토는 그의 경영 수완 덕에 싱가폴의 탄탄한 회사로 손꼽힌다. 동이 터 새벽이 밝아오면 그는 어김없이 제일 먼저 출근해서 사무실의 불을 켰다. 불을 켜는 그의 손끝에서 싱가폴의 아침은 열리고 있었다.

섭씨 40도에서 50도를 넘나드는 파키스탄의 거리에 한국간판 하나가 걸려있다. 월남에서 식당을 하다 온 김세영씨는 한국인에게는 향수를 외국인에게는 한국의 맛을 전하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시작은 방 한 개 가지고 시작했어요. 하다가 손님이 많아지니까 간판도 없이 시작을 했는데 손님이 많아지니까 방을 세 개를 벽을 텄어요 밤에. 그래가지고 식당을 만들었죠. 그래가지고 시작을 하니까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하는데 하여간 한 시간씩 기다렸어요. 우리 음식을 먹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11시 12시까지는 장사를 하고 인제 문을 닫고 만두를 빚어야 돼요. 약 한 1500개를 새벽 네 시까지 했습니다. 그때는 제 모친이 와계셨어요. 그래 모친이 이제 밤새도록 만들어 이제 삶아서 놓으면은 그거 이제 정리해놓고 1500개를 해놓으면은 한 시간 반 이면은 아침 열두시 문 열면은 한 시간 반 이면은 만두 1500개가 다 나가요. 무진장.. 그러니까 잠자는 시간이 없어요. 두 시간 세 시간씩 자는게 한 3개월을 버텼습니다. 단 한 가지 이제 부모님한테 이제 조금 즐겁게 못해드리고 가신게 이제 한이 되고 제 자식들한테 이제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시켜서 다 이제 독립을 시켰으니까 그 한 가지가 이제 부모 Err_Code(23:15) 앞으로 뭐 이제 아직은 젊으니까 앞으로 한 십년동안은 외국에서 좀 더 벌어가지고 노후에 그저 고국에 가서 좀 자식들한테 신세 안지고 편안하게 좀 사는게 이제 희망이고 그래서 지금 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에도 기여해 온 중동 지역은 바로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근로자들의 땅이다. 우리나라의 중동 진출은 월남에서 일하던 근로자 수천 명이 1970년 이란에 있던 미국 회사에 취업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70년대 중반 이후에는 중동 여러 국가에 우리나라의 건설업체 들이 진출해 그 활약은 절정을 이루었고 투입된 인원만 15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한국인의 중동 진출은 투철한 기업가 정신과 현장 근로자들의 선구적인 개척정신이 만들어 낸 하나의 작품이다. 중동 사람들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들을 끝없는 인내와 강인한 패기로 이루어냈던 것이다.

“리비아의 대수로 공사는 사막 내륙에 부존되어 있는 엄청난 양의 수자원을 개발하여 지중해 연안까지 공급하는 대단위 공사입니다. 단일 토목 공사로써는 세계 최대 공사입니다. 이는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로 전 세계가 주목을 하고 있는 대단위 공사입니다.”

이란,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그리고 리비아 등 중동의 곳곳마다 한국인의 땀방울이 배어있다. 중동은 우리에게 70년대의 경제 기적을 이룩하는데 일조한 곳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넘어 한국인의 기술과 근면성의 가치를 세계에 인식시키는 계기를 우리에게 제공한 곳이다.

유럽에 한국이란 낯선 이름을 심기에 힘겨웠던 사람들. 그들은 17세기 화가 루빈스의 한복 입은 남자라는 작품을 알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탈리아에 이주해 지금도 꼬레아라는 성으로 가문을 이어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살고 있는 유럽의 한 곳. 잔다르크가 화형 당했던 도시 르왕에는 역시가 살아있는 듯 진지함이 곳곳에 배어있다. 그 한켠에 주위를 훈훈하게 해주는 장작불 같은 사람이 있었다. 어느 청각 장애아들을 위한 임상센터를 운영하는 한국인 김양희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임상센터에는 프랑스 아동의 10 내지 15%가 되는 학습 장애자들이 치료받고 있었다.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겨우 그의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이 분야에서 알아주는 전문가다.

“외국 사람이 이렇게 개업을 하니까는 침놓는 의사인줄 알고 침맞으러 오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또 언어교정을 하고 블란서 학습이니 지능문제에 대해서 제가 간섭을 하자 이 사람들은 처음에 깜짝 놀랐죠. 외국 사람이 와서 무슨 블란서 말을 가르치냐고 말이에요.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고 성과가 있으니까 병원이 점점 커지고 교수로 차차 쓰게 되고요.”

그가 보살피는 아이들 중에는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도 있다. 힘든 삶을 시작하는 것은 언어장애 아동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피를 나눈 조국의 아이들도 그 곳에서 낯설은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그는 파티를 열고 양부모들과 일 년에 한 두 차례 모임을 가졌다. 그들의 어머니가 있는 조국과의 끈을 엮어서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의 희망이다. 일주일에 한번 입양아와 몇몇 프랑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김양희 박사. 한글과 함께 한국에 대한 애정 또한 마음속에 담아주고 싶어 시작한 일이였다.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는 삶. 그 삶을 지탱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Err_Code(28:30~28:33)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자 다들 해봐. 하나 둘 셋.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1990년 10월 동서냉전의 벽을 마침내 허물고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은 같은 분단의 처지에 있는 우리 민족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독일에 뿌리를 내린 삼만 명의 우리 동포들에게는 한없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독일 통일 이후 독일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통일 독일이 우리 민족의 통일 문제에 시사해주고 있는 많은 교훈들을 놓치지 않고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하여 통일 독일의 선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연구할 수 있게 돼 우리 민족의 소원인 통일을 앞당기는 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곳 독일에 한국이라는 낯선 이름이 어떻게 심어지게 됐을까. 위험한 작업 환경과 벅찬 근무시간 상대적으로 낮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보겠다는 오기와 미래의 계획으로 계약기간을 다부지게 꾸려나간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 의해 오늘날 독일의 한인사회가 시작된 것이다. 2차 세계 대전의 폐허위에 경제 재건을 이룩해 라인강의 기적이란 칭찬을 듣고 있던 독일.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려는 우리에게 독일로의 노동 인력 진출은 국가적으로 해외 진출 외에 개인적 꿈을 일구어 내려는 중요한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독일. 세계의 정치 경제면에서 독일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과 경험 때문에 우리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한 재독 한국인들의 역할이 기대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 이베리아 반도의 스페인에는 약 칠천 명의 한국인이 정열적이면서도 소박한 사람들과 이웃해 살아가고 있다. 스페인의 제 2 도시이자 1992년 올림픽을 개최했던 바르셀로나에는 한국 스포츠사를 운영하는 도영환씨가 살고 있다. 낯선 글, 낯선 사람들의 나라에서 오직 살아야한다는 일념으로 버텨온 지난 10여년. 도씨는 1982년 단 두 대의 재봉틀을 짊어지고 이곳에 인생항로의 닻을 내렸다. 모두 여섯 명이 일하고 있는 그의 상점에는 독립국가 연합 타슈켄트 공화국에서 온 우리 동포 도넬리 아주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배수의 진이였던 이 곳 스페인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절이 바로 그 엊그제 같은데 도시의 가게에는 이제 제법 기간을 잡아 도복의 실밥을 묶고 마무리 작업을 하는 작은 일은 스페인 가정에 하청을 주기까지 한다. 도시는 오후면은 오전 내내 만든 도복을 배달한다. 스페인의 태권도 역시는 마치 한인사와 같다. 스페인 전역에 태권도장이 천여 곳이 있으며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200여 동포 가구가 대부분 태권도 사범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