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0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하나 됨을 확인하기 위하여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담은 영상자료를 만들게 되었다. 단군의 자손으로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 온 배달민족은 백두산을 뿌리로 삶의 터전을 가꾸어 왔으며, 오늘날 전 세계 140여개국의 530만 해외동포를 포함하여 7천만이 자랑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일찍이 세계 각국에 나아간 우리 민족은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세계 속에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 민족은 분단을 극복하여 통일을 이룩하고, 나아가 세계로 웅비할 수 있는 민족 역량을 쌓아야 한다.



세계 한민족의 삶 제 3부 일본



지리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일본. 2차 세계 대전의 폐허를 딛고 그들은 오늘 경제 대국으로 세계 정상에 우뚝 섰다. 이곳 일본에는 대략 70만의 재일동포들이 살아가고 있다. 악조건 속에서도 꿋꿋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재일 동포들. 그들은 왜 이곳에 왔으며 어떤 모습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곳은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인 학교. 재일동포 자녀들과 한국으로부터 온 상사 주재원 자녀들이 함께 공부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다니고 있는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선조들로부터 대를 이어오던 정든 고향땅을 떠나 어떻게 이곳 일본땅에 정착하게 됐는지 알고 있을까.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합병이 되던 해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 불행했던 그날의 역사를 기점으로 일본을 왕래할 수 있게 되면서 한국인은 노동자로 유학생으로 그리고 강제 징집되어 일본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한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국인들은 일본군국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각종 노역과 군사훈련에 강제 동원되었다. 일부 한국인들은 정든 고국을 등진 채 낯선 땅으로 징용과 징병으로 학도병으로 정신대로 남녀를 막론하고 끌려가 일본의 전쟁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군수산업을 중심으로 공업에 치중하게 되고 이에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자 한국인들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그 정책에 이면에는 힘들고 위험한 노동은 일본인 대신 한국인이 하도록 하는 교활한 음모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국인들은 강제적으로 그리고 거간꾼들에 의해 유인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다. 자의든 타의든 이렇게 일본을 건너간 한국인들은 대개 제철소나 도로공사, 탄광 등 중노동을 요하는 힘들고 고달픈 작업장에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당해야만 했던 것이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운명을 바꿀 비행기 한 대가 히로시마 상공에 나타났다. 이 비행기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은 그 막을 내리게 되고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이 되던 해인 1945년 8월 당시 일본에는 236만5천여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이들은 1876년 2월 26일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강화수호조약 이후 특히 1910년 한일합병 이래 대부분 정치적 강제력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은 광복과 함께 귀국했지만 그러나 60만 명이나 되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들은 분단과 광복으로 이어진 조국의 혼미한 상황 탓도 있었지만 일본 내에서의 경제적인 조건으로 어쩔 수 없이 귀국하지 못하고 오늘날의 재일동포 사회를 태동시켰다.

현재 70만에 이르는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어느 지방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인구분포도에 나타는 특색은 대부분의 재일한국인들은 대도시에 집중해 살아가고 있으며 특히 오사카 중심의 관서지방에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모국과 같은 하늘 및 다른 땅에서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재일동포들. 그들의 삶은 이곳 일본 땅에서 어떻게 펼쳐지고 있을까. 일본의 강제로 끌려갔던 한국인들은 해방이 되고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온갖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생활해 왔다. 이주 초기 노동이 주류를 이루던 동포들의 직업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유업뿐만이 아니라 운전사와 같은 기술직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재일동포들이 운영하고 있는 약국이나 병원들도 볼 수가 있는데 이렇게 전문지식을 요하는 약사나 의사, 그리고 교수 같은 전문직들도 많이 늘어가고 있다. 또한 중소기업을 소유하고 있는 재일동포들도 이제는 많이 볼 수가 있게 됐다. 이와 함께 재일 동포 중에서는 악조건을 딛고 일어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기업인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이다. 21세에 일본에 건너간 그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등 안해 본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온갖 고생을 겪은 끝에 오늘날 한일 양국의 우뚝 솟은 롯데 그룹을 일으켰다. 또 일본의 운수업계에서 신화적 인물이 돼버린 MK택시회사의 유봉식회장이 있다. 그는 불과 10대의 택시로 교토에서 택시사업을 시작해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친절하고 깨끗한 택시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이곳 오사카는 일본 제2의 도시로서 제철과 섬유공장 및 관련 중소기업들이 가득 들어찬 공업도시다. 이러한 오사카의 발전은 한국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오사카가 공업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재일교포 초기 이주자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이다. 이곳 오사카에 거주해 살던 재일동포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갖가지 가내 수공업 분야에 뛰어들었다. 일본사람들조차도 힘들어서 선뜻 하려고 하지 않았던 일들을 재일동포들은 열심히 해냈던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지금은 비록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가족들을 위해 끈기와 인내로 힘든 생활을 버텨왔던 것이다. 그렇게 재일동포 1세들은 이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 초기 이주자들은 연륜이 쌓여 소규모의 가내 수공업 형태의 공장을 운영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플라스틱 제품 공장과 도색 공장, 그리고 신발 공장에서부터 각종 기계부품 생산 공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장들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일본 각지에서 재일동포들은 악조건을 극복하고 착실한 기반을 닦았으며 상공회를 조직해서 상호협력 하는 등 동포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재래시장을 연상시키는 조선시장에는 각종 김치와 젓갈을 파는 상점이 즐비하게 서있고 한복점도 눈에 띄어 바로 여기가 재일동포들의 시장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조선시장.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속에 여전히 한국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이곳은 바로 재일동포들의 영원한 고장이자 그리움의 대상인 것이다. 재일동포들의 자녀 교육열은 한국 못지않게 매우 높다. 재일동포 1세의 교육 수준이 비교적 낮고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입장에 놓여있기 때문에 이러한 아픔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의지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재일동포들에게 있어 자녀교육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이 해방된 뒤 재일 한국인들은 각지에 민족학교를 설립해 민족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한국계 민족학교도 일본교육법상 인가를 받아야 한다는 방침으로 인가를 받지 못한 학교는 모두 폐교하게 되었다. 지금도 외국인학교의 정규 인가는 가급적 해주지 않는 것이 일본 정부의 방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일동포들은 자녀가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자녀의 교육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자녀를 한국인답게 키우기에는 일본이라는 현실이 너무도 큰 비중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갈등을 하지 않을 수 가 없다. 일본학교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한국학교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녀가 있는 재일동포들이라면 아마도 한번쯤은 겪어야 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교육문제는 어려서부터 부딪히는 고민거리이자 일본에서 재일동포사회가 과연 존재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때문에 재일한국인 1세와 2세들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이러한 일본 내 현실은 큰 장벽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재일교포 부모들은 자녀의 입학 문제로 고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민간계통의 한국학교에서는 민족교육을 실시하고는 있으나 동경한국학교를 제외한 다른 학교에서는 대부분의 수업이 일본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주일에 세 시간 내지 네 시간의 한국어 시간이 있을 뿐 그 외에는 일본 문부성 검정 교과서를 가지고 다른 일본인 학교와 비슷한 수업 편성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받는다. 일본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교포(아줌마):소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는 또 Err_Code(16:13)이 공부 애들이랑 공부했어요. 또 그러지만은 대학교 시험이 어려워요. 자기가 가고 싶은 학교 못 들어가요. 여기학교는 일본사람만 여기학교는 일본사람만 그러니까 Err_Code(16:43)도 Err_Code(16:48 일본어) 그래서 문제요. 애들이.



교포(학생 1): 지금은 대학 3학년으로 카나와나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일본에 있는 3세, 4세 동포들은 거의 한글 말을 못하지만은 민족심은 한국 사람으로 똑똑하게 한국 사람답게 살아있습니다. 민족학교가 좋기 때문에 한글 말을 배울 수 있는 민족학교를 더 많이 세우고 싶고.

교포(학생 2): Err_Code(17:44~18:22, 일본어, 인식불가)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고 한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재일동포 젊은이들. 그들은 일본식 이름과 일본말을 사용하고 한국의 된장찌개 같은 고유 음식보다는 일본의 우동과 초밥에 더 익숙해져 있는 일본의 다른 젊은이들과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해 왔다. 그렇다면 재일동포 젊은이들의 결혼관은 어떨까.



교포(학생 1): 일본에서 살아있는 재일교포 중에서 교포끼리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자기는 그렇게 생각안하고 일본사람이라도 교포라도 우리나라 사람도 자기가 사랑하고 납득되는 그런 결혼이면.



이러한 일본의 교육을 받고 자라온 재일동포 2세와 3세들. 그들의 대다수는 한국말과 한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한다. 이렇게 일본의 격심한 차별정책과 강압적인 동화 정책으로 동포사회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남녀 간의 결혼문제에서 특히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 아내나 남편을 맞이하고 있는 재일동포 젊은이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데 최근에는 그 수가 전체의 약 80%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신랑: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사랑의 복지 화목과 가족, 가정을 꾸려 나갈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한국인들 간에 결혼이 어려워지고 있는 재일동포사회에서는 민단이다 조총련이다를 가리고 나면 그나마 한국인들 간에 결혼 확률이 낮아지기 때문에 이념을 떠난 결혼이 많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신부: 중학교까지 우리학교에서 배웠고.

한국기자: 민족학교.

신부: 예. 조선학교에서 배웠고. 그중에서도 민족교육 받아봤으니까 어릴 때부터 일본인하고 결혼하자는 맘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본인하고 결혼했다면 그 물론 속 깊은 곳에서 이해하지 못한 점이라든가 그런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것이 동포끼리 결혼했으니까 알아주십니다. 일반 일본인보다도 일본에 사는 한국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Err_Code(20:56)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아들, 딸이 자라날 때에는 환경을 잘 꾸려주고 싶고 일본인 속에는 아직도 차별하는 마음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일본사람처럼 살려고 해도 자기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니까 사실대로 받아들이고 훌륭하게 자라주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결혼문제 이외에도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 동포들에게 가장 커다란 문제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일본 사회로 진출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할 수가 없고 선거권도 없는 곳,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감수하고 살아가느니 국적을 바꾸면 이러한 불합리한 사회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데 한번쯤 이런 생각을 안 해본 동포들은 없을 것이다. 특히 졸업을 앞둔 그래서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사회로의 진출을 눈앞에 둔 학생들에게 더욱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재일동포들이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이 있다면은 그것은 바로 일본정부와 사회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닐까. 그중에도 지문날인 강요는 재일동포들이 당하고 있는 차별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외국인이 아니면 내국인이라는 일본인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일본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재일동포들에게 많은 제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재일동포들의 많은 노력으로 지문날인이라는 제도가 가족 등록제로 바뀌기는 했지만 아직도 그 안에 내포돼있는 차별대우는 여전하기만 하다.



Err_Code(23:33~23:38 일본 뉴스 자료화면, 일본어, 인식불가.)

오늘날 재일동포 대다수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원해서 라기 보다는 일본사회의 차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본명조차 쓸 수 없는 차별적인 상황은 참정권의 제외뿐만 아니라 민족교육의 제약과 법적 지위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대학을 나와도 자신이 원하는 곳에 취직을 할 수 없는 현실은 많은 재일동포 젊은이들에게 절망감을 안겨다 준다. 그러나 많은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그렇게 주저 않지는 않는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현실의 장벽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말을 쓰고 일본인과 똑같이 세금을 내고 살아온 그들에게 단지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한다는 것은 일본에 의해 생겨난 과거 불행했던 역사를 일본인들 스스로가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본인들 중에서도 이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일본인 자신들조차 인정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는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일본인들은 이들이 조용히 살기를 원한다. 왜 이들이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그렇게 애써야 하는지 모른채 말이다. 일본이 귀화를 허용하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적지 않은 재일동포들이 이러한 냉엄한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귀화를 선택하고 있다. 일본국적의 취득은 바로 귀화를 뜻하고 귀화는 일본인으로 동화됨을 의미한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암암리에 그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관계자(일본어, 더빙):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이러한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조직을 만들었지만 역시 피해가 있어서, 예를 들어 차별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었죠.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서 우리는 조직적으로 운영해 나가자고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동화정책 속에서 자라온 재일동포 젊은이들 그들의 이면에는 어떠한 정서들이 숨어있을까. 해마다 재일동포 2세와 3세 젊은이들은 다양한 민족문화 축제를 열고 있다.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고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는 재일동포 젊은이들. 그들의 모습에서 일본의 동화정책이 표면적으로 먹혀들어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한민족이 지닌 정신까지는 동화시키지 못했음을 느끼게 해준다. 일본의 대중예술계에도 우리민족의 혼을 심는 이가 있다. 박규리. 일본이름은 후지까와 지야끼. 그녀는 한때 한국계라는 것을 숨기며 일본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뿌리를 감추고 일본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새삼 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일교포 3세인 그녀는 한국인임을 떳떳하게 밝히고 새출발을 선언한 것이다. 애초에 한국인이었음을. 그리고 지금도 한국인임을 그녀는 새삼 깨달았던 것이다. 앞으로 일본무대에서 활동하는데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그녀는 누가 묻기도 전에 먼저 한국인임을 외쳤던 것이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재일동포 젊은이들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민족의 뿌리가 깊게 내려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후지까와 지야끼로 살아왔지만은 이제 남은 인생을 박규리라는 한국인으로 떳떳하게 살아갈 것이다.

일본 곳곳에는 우리문화의 흔적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도공들이 왜병들에 의해 끌려간 뒤 일본의 도자기 문화는 급속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아직도 일본에는 조선시대의 도공들의 한 맺힌 혼이 담긴 도자기들이 곳곳에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들,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우리의 도자기들을 우리는 일본에서 만나게 된다. 왜 일본인들은 한국 도자기에 그토록 애착을 갖는 것일까. 그들이 아무리 애착을 갖는다 해도 그것은 결국 한민족의 숨결과 혼으로 태동한 문화재인 것이다. 조선시대 우리의 서민용 밥그릇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도다완이라는 이름으로 국보로 지정되어 많은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어도 일본에는 우리 문화의 흔적들이 많이 있다. 이렇게 우리의 빼어난 문화는 오랜 세월 꾸준하게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미쳐왔던 것이다. 그동안 많은 방문객을 통해서 또는 통신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는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한반도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된 후 일제 36년간의 세월동안 우수한 우리 문화재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수탈당했다. 그 문화재들은 본디 자신의 땅이 아닌 다른 나라 땅으로 건너가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말없이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일본 속에 한국문화, 그래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비록 많은 우리의 문화재가 일본인들에 의해 수탈당했지만 문화 속에 깃들은 한민족의 혼은 수탈당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예부터 일본으로 문화를 전해주던 한반도. 그 문화의 전파자 역할은 오늘날에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문화는 일본 어디를 가도 쉽게 만날 수 가 있는 친숙한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재일동포(일본어, 더빙): 재일동포사회는 조총련과 민단으로 쪼개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깝더라도 각종 대회나 기념식 그리고 결혼식 같은 행사에서는 서로서로가 다른 모습을 보이고 그러니까 결혼식에 가더라도 나는 민단사람, 내 친구는 조총련사람 정말 가슴 아픕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생각하면 대단히 마음이 괴롭습니다.



1946년 10월 3일 창단된 민단은 재일조선거류민단으로 시작됐다. 창단 당시 반공 민족주의 정신이 강했기 때문에 조총련과의 마찰이 끊일 새가 없었다. 창단 목적은 조총련과 대항하면서 재일 한국인들의 권익 옹호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민단을 이끌어온 재일동포 1세들, 조국 땅에서 6.25전쟁이 일어나자 641명이 스스로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 생명을 걸고 조국을 지켰던 그들. 이제 그들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아 2세와 3세들이 21세기의 새로운 민단을 준비해 나가고 있다. 그간 민단은 조국을 지척에 두고 가지 못했던 조총련 동포들에게 모국 성묘 방문단 등 여러 가지 계기를 마련해서 한국을 방문토록 주선했다. 이러한 방문을 통해 한국의 모습이 재일동포 사회에 새롭게 알려지게 되자 많은 조총련 동포들이 이념을 떠나 뿌리를 찾아서 지금까지 4만 4천여 명이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조총련은 어떠한가. 이와는 반대로 조총련의 조직은 많이 흔들리고 있다. 조총련에서 실시한 북송 사업은 많은 재일동포들에게 외면을 받아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그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아픔만 남겨 놓았다. 구소련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 게다가 김일성의 죽음으로 조총련의 조직 기반이 동요하고 있으며 입지 또한 약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아직 북한의 기본 노선에 따라 폐쇄의 빗장을 풀지는 않고 있다.

1990년대에 이르러 민단은 재일동포 사회의 화합을 이룩하기 위해 조총련과 비정치적이며 인도적인 차원의 교류를 과감히 추진했다. 특히 91년도에 남북 단일팀으로 참가한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 공동으로 응원을 한 것은 화합 노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분단된 조국의 탁수 선수들이 이념을 초월해 단일팀으로 출전했던 지바세계탁구선수권대회. 재일한국인들은 이념을 접어두고 오직 한민족 한핏줄이 이기기를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것이다. 응원하는 그들에게 이념도 사상도 떠나있었다. 오직 한민족이라는 끈끈한 유대만이 그들을 감싸 안고 있었던 것이다. 분단된 조국이 탁구를 통해 하나되어 세계를 제패하던 그날 그 모습, 그 자리는 결코 한국인들에게 잊혀 지지 않을 것이다. 민단은 조총련과 94년에 교토혼도 1200주년 행사와 각종 문화, 체육행사를 공동으로 개최하면서 서로 간에 반목의 세월을 접어두고 화해의 분위기 형성을 위해 애쓰고 있다. 머지않아 상호화합 협력하는 분위기가 동포사회에 지배적인 흐름이 될 것이다. 이것은 시대적 요구이며 우리는 한핏줄이라는 민족의식이 재일동포들의 혈관마다 흐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일동포들의 교류와 협력은 일본사회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될 것이며 나아가서는 통일 한국 건설에 주춧돌이 되지 않겠는가.

재일동포들에게 있어 조국의 발전된 모습은 그들의 생활과 의식구조까지 바꿔놓고 있다. 심한 사회적 차별로 인해 가급적이면 한국인임을 감추고 살아왔던 이들에게 조국의 발전은 큰 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조국의 성장이 재일동포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 것처럼 이제 재일동포들은 과거의 역경을 딛고 일어나 모국의 도움을 받기 보다는 모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한국이 서울 올림픽을 치를 때에도 재일동포들은 540억 원의 성금을 모국으로 보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재일동포 실업인들은 모국에 대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대부분 고생 끝에 자수성가한 이들은 모국의 경제발전에 한몫을 하고자 오늘도 현해탄을 오간다. 이런 재일동포들에게 가장 큰 힘이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조국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힘을 길러 세계의 강국으로 성장한 길이 아니겠는가. 그동안 한국은 파란만장한 역사를 딛고 일어섰다. 6.25 전쟁의 잿더미 위에서 불사조처럼 일어나 짧은 세월동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의지와 끈기는 나보다는 남을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모든 힘을 모았던 것이다. 그러한 힘은 세계인들도 주목했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결과를 가져왔고 오늘 한국을 이 자리에 서게 했다. 한민족이 지닌 저력으로 다시 일어선 사람들은 허리끈을 졸라매고 앞만 보고 오늘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이제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대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보다 많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기울일 것이다. 그 길이야말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민족의 앞길을 더욱 확고하게 해 줄 것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도 어언 50여년. 일본의 처음 정착했던 재일한국인들도 이제는 약 5%내외 밖에 남지 않았으며 동포사회 또한 2세와 3세들로 세대교체 되어 이제 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동안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차별과 멸시, 그리고 생활고로 인한 숱한 고생을 이겨내고 그들의 모든 꿈을 자녀양육에 쏟아 훌륭한 자녀들을 키워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이주해와 한 많은 인생을 살아온 재일동포 1세들. 이제 이들의 아픈 역사를 뒤로한 채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희망찬 재일동포사회의 역사가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