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고 우리 정부가 서기 전 어느 신문에 요즘말로 캠페인을 보면 ㄱㄴ배워서 좋은 나라 세우자였습니다. 이 신문을 따라읽으면 경기도에서만 전체도민의 40%가 글을 깨쳐 전 인구의 65%가 암흑에서 광명을 찾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이른바 UN 감시 하에 첫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암흑에서 광명을 찾았다해도 2100만 인구가운데 600만 명이 까막눈이었던 그 때. 유세장에서 입후보한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외치던 숫자를 따라 투표용지 위에 그려진 막대기를 세서 찍는 도리밖엔 없었습니다. 그 막대기호가 실린 투표용지와 선거포스터는 20년전 까지도 우리 모두를 문맹자로 매도해버렸습니다. 1947년 어느 날 신문은 서울에 국민학교 졸업생 13,000명 가운데 절반인 6500명만 상급학교에 진학했다고 전합니다. 전국적으로 중학교가 380개밖에 없던 그 때. 중학은커녕 국민학교도 다니는 둥 마는 둥 해야 했으므로 그 이듬해 선 정부는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하기로 하고 초등교육비 그 때 돈 18억 원을 잡아넣으면서 중학교 58개를 더 세울 작정을 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댓바람에 그 모든 작정과 기대를 앗아갔습니다. 몇자 깨우쳤던 가갸거겨도 전쟁통에 다시 까맣게 보였고 국군이 어디로 진격한다 라는 삐라 조차 읽기조차 들어서 알아야했던 그 때. 피난수도 부산이나 수복지구 도회지에서는 책걸상도 없는 맨 땅 노천교실에서 우리들은 바둑아, 바둑아 영희야 철수야로 시작되는 낡은 교과서로부터 책읽기를 시작해야했습니다. 책이라야 지금의 화장지만도 못한 그 때 얘기로 똥종이였는데 그나마 우리 손으로 책을 찍을 수 없어 책 뒷 표지에는 더러 미합중국정부의 원조 운운하는 글귀가 덧붙여지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쟁 통에 급히 펴낸 탓이라며 책을 각자 제대로 꿰매 써달라는 주문이 있는가하면 책 맨 뒷장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들딸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로 시작되는 세 가지의 우리의 맹세가 어느 책에곤 쪽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제는 내리막 삶의 길에 들어선 중장년들로 하여금 그 청춘을 지금은 사라진 광화문 네거리 아치탑의 구호처럼 살아오게 한 연원이었죠. 지금 아이들 음악에서는 자리가 없어진 노래 학교종이 땡땡땡. 그 학교종이 수업시작을 알리면 선생님은 언제나 어제 배운 것 다외웠냐 라며 화두를 던집니다. 그러나 꼴매기니 새끼꼬기니 집안 일로 공부를 엄두 못내게 하던 그 때. 그래서 3, 4학년이 돼도 국어책하나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그 때. 선생님의 화두는 우리들 가슴을 뜨끔하게 했고 토막분필이 놓인 흑칠판에 구구단을 지우면서 분필가루를 뒤집어 쓴 선생님과 싸리 회초리 그리고 벌서는 우리모습은 알 수 없는 애련에 빠져들곤 했죠.

“그 때는 또 가방을 가진 학생들이 한 반에 뭐 몇 명이 안됐습니다. 이렇게 둘러메는 가방이었는데요. 이 저희들 같은 경우는 인제 까만 천에다가 물을 들입니다. 그래서 그걸 책보라 그러죠. 그게 전부 인제 등에다 둘러메고 이 책보를 그렇게 해서 책을 싸가지고 다녔었구요. 그 때는 옷 한 벌 가지고 4.5년씩 입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옷을 맞는 옷을 입히면은 금방 이렇게 몸이 크니까 그래 이제 어머니가 시장에 가서 옷을 사주시면 두루마기처럼 큰 걸 찾으십니다. 그래야만 이제 4.5년 또 입을 수 있고 또 그 옷이 떨어지면 또 기워서 입을 수도 있고 해서 그 때 보면은 뭐 등이 나온 학생들 그 다음에 너무 큰 옷을 입은 학생들. 사진 보면 지금 참 재미있는 그러한 풍경이 아니었던가 생각을 합니다.”

지금은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고 문맹률이 가장 낮다는 나라로 꼽히는 우리라고들 합니다만은 정부통계를 보면 1960년 우리나라의 문맹률이 28%였다니 네 사람에 한명이 넘는 사람들이 까막눈이었으니 그 전에야 한 동네에 글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10손가락에 꼽을 정도였죠. 전쟁은 끝났다곤 하지만은 군에 간 아들을 둔 늙은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온 편지를 들고 혹 무슨 탈이라도 난 것이 아닌가하며 온 동네를 다니며 고등과학생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고등과학생은 반갑지 않은 내용은 그저 속으로 삼키고 무사하다는 얘기를 만들어 전해주면은 그 어머니는 이내 편지를 대신 쓰게 했습니다. 에미는 한시도 네 걱정을 놓을수가 없다로 시작되는 편지글을 읽어주는 늙은 어머니와 대신 쓰는 학생이 알 수 없는 설움으로 적어가던 편지들. 정부에서는 지난해 12월부터 금년 4월까지 다섯 달 동안을 문맹교육기간으로 설정 본격적인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지난 13일에는 문맹교육 봉사단 결성대회가 열렸습니다. 그 불치라던 문맹의 퇴치운동이 시작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습니다. 대갓집 대청이나 빈 창고에 멍석을 깔고 최영신의 상록수식 한글 깨치기 운동이 벌어집니다. 면소 사람이 낫을 놓고 이것이 ㄱ자요라던 낫 놓고 기역자 야학이 시작되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한 입이 돼 따라 읽던 가갸거겨. 소록도를 찾아가던 하나운이 어느 처마 밑에서 개구리 울음소리에 서러워 지었다는 가갸거겨. 그 시를 읽고 노천명을 울리게 했다는 그 개구리 울음 같은 가갸거겨는 바둑이 철수 영희와 함께 애어른의 까막눈을 한둘씩 눈 뜨게 했습니다. 이와 함께 그 때 서울내기들이 너도나도 나서던 대학생들의 농촌계몽운동도 농촌의 문맹퇴치에 큰 몫을 했습니다. 지금은 농촌 봉사활동이라 하지만 그 때 대학생들이 펼치던 한글 깨우치기와 의료봉사 등 계몽활동은 농촌의 피폐함을 조금은 덜어주곤 했죠.

“한 이제 많이 나올 때는 뭐 한 2, 30명 그냥 호롱불을 켠 조그만 사랑방이 빽빽할 정도로 그냥 땀내가 물씬물씬나고 발꼬랑내도 나고. 이런 상황이었고 뭐 또 적게는 한 열댓 명 씩 이렇게도 오기도 하고 하는데. 아 도시에서 교육받은 사람이 자기들한테 그렇게 전달한다하는 그것 때문에 이렇게 대학생들이 가면 또 이렇게 적극적으로 모여드는 요즘하고 다릅니다. 그 때 분위기는 대학생이 가서 이렇게 농촌에서 뭘 한다 하면은 그렇게 부러운 존재라는 그런 인식도 있겠지만은 아 저 사람이 도시에 나가서 배운 것을 우리한테 전달한다. 우리는 전혀 접할 수 없는 새로운 문명에 접한다 이런 어떤 인식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고요.”

40년 전인 1954년 봄, 이 신문은 시골학생이 부형과 함께 서울에 와 며칠 묵으며 입학시험만 치르는데 쌀 8가마 값이 들고 입학금은 10만환이나 돼서 결국 농촌에서 자식하나 상급학교에 보내려면은 우선은 쌀 40가마가 필요하다고 전합니다. 요즘 돈으로 셈하면 500만원이나 되던 그 때. 쌀은 예나제나 우리들의 심장 같은 것이어서 아이 진학을 위해 쌀 마흔 가마를 내면 집안 뿌리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중학 진학을 이미 포기한 아버지는 아이 머리가 아까우니 중학을 보내자던 선생님의 설득 앞에 늘 자괴어린 한숨을 내뱉곤 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 값에라며 모든 것을 아이 공부를 위해 희생시키기로 작정한 아버지를 따라 아이가 서울로 가는 날. 같은 또래 아이들은 사립안에 몸을 감추고 부러움에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죠. 그런가하면 그 무렵 겨울 우시장에는 대학생들의 등록금 때문에 팔려나간 소들도 참 많았습니다. 정지용이 해살피 금빛 게으른 울음 운다고 하던 고향의 황소. 팔릴 신세인 줄 알 리 있었겠습니까만은 그래서 대학을 우리는 우골탑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이 다시 서울이 된 것을 환도라고 했죠. 쉽게 아물 수 없는 전쟁의 상처 속으로 토박이들이 되돌아오고 피난민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어 서울은 파시를 이룹니다. 폐허가 되버린 경복궁. 쌀가마 내고 소 판 돈으로 청운의 꿈을 펼치리라 하던 학생들이 환도가 된 서울에서 벌인 첫 행사는 전쟁 통에 무성하게 자란 경복궁의 잡초를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1955년 3월의 이 모습. 국부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신을 축하한다며 군인들 틈에 섞여 행사를 벌여야 했던 학생들. 40년전의 일이니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고 있을 이 학생들. 북진통일 시민 총궐기 대회 따위의 행사가 열리면 출석표까지 제출해야 했던 그 때. 우리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라며 우리의 맹세를 성동원두라고 곧잘 쓰이던 서울운동장이 떠나라고 복창했으며 무슨무슨 강조기간이 왜 그렇게 많든지 한 해에도 몇 차례 벌어지는 교통안전 강조기간을 위한 중고생대항 가장행렬 대회 같은 데도 어김없이 참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행사마다 비록 동원된 모습이었지만 그 때 학생복은 정말 뽐낼 만 했죠. 교복칼라가 구겨지지 말라고 목둘레에 하얀 뿔테를 둘렀고 여학생들은 풀 먹인 하얀 칼라가 구겨질 새라 요즘 말로 목과 어깨에 힘을 주며 걸어야했습니다. 그러나 5.16이 나고 불과 보름 만에 내려진 중고등학생 삭발령은 그 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인다라는 산문 청춘예찬을 무색하게 만들어놨습니다. 남학생 머리는 바리깡으로 깎여나갔고 여학생 역시 머리를 조금만 멋스럽게 길러도 말괄량이 일본식 발음인 후라빠로 불량소녀 취급을 받아야하는 그 오랜 금도의 세월을 만들어놨습니다.

“그 때는 지금 그 창경원에 벚꽃이 막 피면은 벚꽃놀이를 했었거든요. 근데 밤벚꽃놀이라는 게 있었어요. 밤에도. 주로 그 쌍쌍이 많이 가는데 저희는 친구들이랑 사복을 하고 밤에 벚꽃놀이를 갔어요. 그것도 밤에는 사실 다니면 안되거든요 학생들은. 그리고 꼭 교복을 입어야 되고 그런데 이제 사복들을 하고 갔는데 그 시절에는요 사진 찍는 분들이 막 사진을 찍으라 그래요. 그러면은 그 벚꽃 앞에 딱 앉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한번은 제 친구하고 놀러를 갔더니 사진을 찍으라고 그래갖고 찍었거든요 신나갖고. 그런데 이 아저씨가 그 사진을 어떻게 만들어서 이렇게 이제 판을 해가지고 거기에다 넣어갖고 돌렸어요. 그래서 그 이튿날 그냥 호출을 딱 되갖고 친구하고 저하고 그 증거가 있으니까 거짓말도 못하잖아요. 하루 종일 그냥 야단맞고 반성문 쓰고 일주일인가 매일 훈육실에 불려가가지고 반성문 쓰고 방과 후에 두 시간인가 화장실청소하고 그러던 생각이 나고요.”

1957년 서울대 57학번들의 입학식 모습입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지도급 인사로 또는 어린 손주들 재롱 속에 살아가는 이들이 그 때 단발머리 모습으로 부푼 꿈을 가누지 못할 때입니다. 그러나 부푼 꿈도 잠깐. 우골탑의 대학생들은 곧 고학생이 되고 맙니다. 하숙비가 몇 달씩 밀려 밤늦게 주인 몰래 냉기 깔린 방으로 들어왔다가 마음씨 좋은 주인아주머니가 내놓은 저녁상. 콩나물과 두부 김치가 고작인 그 늦저녁을 목이 메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고향에서 하숙비가 올라오면 밀린 하숙비를 셈하고 싼 하숙을 찾아 돈암동이며 미아리로 리어카 짐을 끌고 헤매던 그 때. 2원 50전하던 전차표 아끼느라 우마차를 얻어 타고 굴레방 다리를 지나기도 했고 여름방학 고향에서 빈손으로 올라온 학생들은 가을 등록을 위해 피를 팔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에 신문 기사를 보면 6.7월보다 8.9월에 피 파는 학생이 많고 9월 한 달 153명 가운데 131명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피를 팔았다고 했고 그러다 허약한 몸을 가누지 못한 어느 학생의 죽음과 끝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어느 학생의 자살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돈 많은 집안 학생의 뒷문 입학, 보결 입학이 선행하고 있었고 문교부장관이 국회에 불려나가 곤욕을 치루는 일도 있었습니다. 해방되던 해 2300개였던 국민학교는 1950년에 3000개 1953년에 4000개 1960년에 5000개로 늘어났지만 늘어가는 아이들 때문에 국민학교 한반 정원을 80명도 넘게 해놓고서도 1, 2학년은 삼부제 3, 4학년은 이부제 수업을 좀 채 면할 수가 없었던 그 때. 좁은 문을 뚫기 위한 일류병 경쟁은 중학교 입시때 부터 극심, 극성스러웠습니다. 1965년에 이른바 무즙 파동은 그 일류병에다가 치맛바람 모성과잉이 얽혀진 사건이었죠. 그 때 머리 좋고 내노라하는 집안 아이들이 몰린다는 경기중학시험에 무즙으로도 엿을 만들 수 있다 라고 쓴 학생들이 떨어졌고 학부모들이 교장실에 몰려가서 급기야는 재판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불합격생 39명이 재판 끝에 경기중학에 입학하게 된 이 파동은 경기 중고와 서울대학 이른바 KS라인이 일류인생과 이삼류의 인생을 판가름 낸다며 열두어살 아이들로 하여금 6학년 과정을 또다시 달달 외우게 하는 재수생으로 만들게 했습니다. 공부라야 요즘이라고 크게 달라졌겠습니까만은 이른바 주입식 공부였고 외움 투성이었습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과목을 국산사자 음미실체 마치 난수표를 푸는 음어식으로 만든 시간표에 따라 봄이 오면 산에 들에 하는 노래를 8844 5844 등 숫자음계로 외워야했고 빛의 삼원색, 체조 순서를 암기하면서 당쟁사와의 연대를 무갑기을 하며 머리에 집어넣는가 하며 이조 오백년 27 임금님 시대를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으로 외우면서 섭렵한 양 했습니다. 5.16이 나자 학교에서는 혁명공약을 외워야 한다며 아이들을 부산스럽게 하더니 급기야 25년 전인 1968년 12월.

“1968년 12월 5일 우리 교육사상 처음으로 국민교육 헌장이 선포됐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 헌장이 선포되면서 이를 외워야하는 아이들은 등하교길에서도 끝말인 대통령 박정희까지 암송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그 국민교육 헌장을 외워야만 학교에서 급식하는 옥수수 빵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는 그 끊임없는 암송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것이 공부하는 길임에 전혀 의심하지 않으면서 잠을 쫓기 위해 세코날이니 나이트스루니 하는 각성제까지 먹어가면서 우리들 소년기는 천근의 무게에 짓눌려 흘러갔고 이윽고 1969년 중학교 입학시험제도가 폐지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시험의 시작이었죠. 바로 이른바 뺑뺑이 세대의 출연이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갔더니 담임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에요. 너희들은 이제 시험을 안보고 중학교 가게 됐다하는 말씀을 하시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그 때 들었던 기분에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굉장히 좋았어요.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이제 그 친구들 애들 이름이 참 좋아갖고 그냥 와하면서 이제 함성을 터뜨리고 그렇게 해갖고 굉장히 기분이 들뜨고 그랬었습니다. 막상 이제 추첨을 할 제 그때는 그 요새하던 그 주택복권식의 무슨 원통 같은 걸 거기서 돌렸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 때 기분에 이제 그걸 봤을 때 드는 느낌이 야 이거 그래도 나한테 중학교가는 거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고 일생에 있어서 굉장히 획기적인 변환데 이거를 그냥 뭐 은행하나 뭐 똑 떨어지면 야 이게 너 갈 데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굉장히 아쉽고 또 한편으로는 너무 쉽게 끝난다하는 생각도 들고”

꽃잎하나 갈피에 끼워 순애보로 간직하던 이 책들을 기억하십니까. 그 삭막한 암송의 시대에서도 우리들의 긴 밤으로 와서 오래 머물러 조금의 안식을 주던 시와 소설 읽기. 그러다가 소월이 조만식 선생을 그리워 한 JMS라는 시를 흉내 내 K에게 P에게 라는 이니셜로 제복과 입시에 찌들어 온 우리들 사춘기에 프롤로그를 풀어가던 때도 있었죠. 그랬죠. 그래서 우리는 누가 묻지는 않았는데도 취미는 독서라는 답을 늘 준비하고 다녔습니다. 엊그제 새 자리에 오른 누구의 프로필에도 그의 넉넉한 공부에도 불구하고 취미는 독서라 했습니다. 태정태세 문단세를 주문처럼 외웠고 그리고 콘사이스에 깨알 같은 단어를 삼키듯 암기하면서 취미를 독서라고 해야 했던 그 때 소년들의 아이들이 엊그제 치룬 수능시험에 나온 내 마음 아실리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리 그래도 어디나 계실량이면 하는 문제가 아이들 손을 곱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극락왕생하실 성철 큰 스님의 책을 읽지 말라던 나무람이 곰곰이 되새겨지는 밤입니다. 이교도의 경전을 암송하듯 군사행진에 팔높이처럼 높이 들어 책 읽던 우리의 미명기 그 때를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