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꽃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꽃은 밤을 넘어 왔습니다. 봄이 밤을 달려온 것입니다. 남도 어디에선가 제 몸의 흙을 떨어버리고 도시의 아침을 위해 달려왔을 꽃들. 그러나 이 새벽에 꽃시장에 모여든 남도 사람들이 지나온 길 저 너머에는 동강난 밤을 피해 달려온 숱한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동강난 밤 그것은 통행금지 혹은 통금시간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태어나 전쟁의 포연 속에서도 엄연했고 그리고 그 후 80년대의 문이 열릴 때까지 우리의 모든 체질을 밤 알레르기성으로 바꾸어놓았던 통금이라는 그 말. 통금 사이렌이 우리 일상의 매정한 마침표로 울리면 우리 모두는 있는 그 자리에서 한발자욱도 꼼짝할 수 없었고 그래서 이런저런 유명한 사람들이 그 묶여버린 밤을 한 장의 야간 통행증으로 활보할 때 그것이 우리를 서민임을 확인시켜주던 그 때. 무려 37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그 밤의 시간들. 그 잃어버린 시간 속에는 앓는 아이를 들쳐업고 경찰지소를 달려가던 우리 어머니의 안타까움과 밤으로난 긴 여로를 기다리는 대합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우리들 초라한 모습이 삶의 별곡처럼 남아있습니다. 그 동강이 나서 낙엽처럼 흩어졌던 삶의 별곡. 그 통금의 시절 그 때를 아십니까.

참으로 허망하게 전쟁이 막을 내렸을 때 판문점이라는 낯선 지명과 인민군복 차림의 남일이 휴전회담 대표로 나온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지긋지긋했던 그 전쟁이 그러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한숨을 지었습니다. 그래 38선의 봄이니 판문점의 달밤이니 하는 유행가가 여전히 절실하게 불리우고 제 오열이니 간첩이니 하는 말이 부쩍 늘어나 방첩 강조 기간이라는 현수막이 매일같이 걸리기 시작하던 그 이듬해 1954년 봄. 우리는 우리의 평화를 위해 밤의 자유를 저당 잡혀야 했습니다. 해방직후 미군정청이 치안유지를 위해 서울과 인천에 내린 통금령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몇 번씩 바뀌면서도 계속돼 왔는데 1954년 4월 들어서부터는 전국 모든 지역에 통금이 확대돼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자유대한의 밤 7시간은 부자유 속에 가두어졌고 전쟁중인 나라를 빼고는 세계에서도 유일하다던 우리네 통금은 차꼬처럼 우리들의 발목을 묶었습니다. 밤의 자유를 묶어놓지 않고서는 치안을 감당할 수 없었던 나약한 나라형편도 형편이었지만 하루 24시간 다 쓴다고 해도 제 한 몸 앞가림하기엔 부족했던 그 때. 오히려 단 하나의 살림밑천인 육신을 한시라도 더 움직여야 연명할 수 있었기에 통금은 50년대 그 척박했던 새벽을 더욱 초라한 안달로 몰아가곤 했습니다. 기억에도 새로운 대전발 0시 50분. 해공 신익희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더 유명해진 그 목포행 완행열차는 유행가 노랫말처럼 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밤에도 하루저녁 여인숙 값을 아끼겠다는 그 때 가난한 사람들의 서러운 사연을 담고 대전역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기차시각과는 아랑곳없이 통금시간은 왔고 그렇게 밤에라도 움직이지 않으면은 살아가기 어려웠던 사람들은 피난 열차를 기다리던 심정으로 두 세 시간 혹은 서 너 시간을 서로의 체온에 기대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목포행 완행열차는 용산서 떠나 여기 대전까지 오는데 여섯 시간 내지 다섯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차를 이용하는 사람은 부산방면에서 오는 손님과 또 대전 근교에 있는 사람. 먼저 온 손님은 통행금지가 12시에 통행금지기 때문에 그 전에 미리와가지고서 두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정도는 대합실에 와서 대기 하고 있다가 그 차를 참 이용을 참 많이 했습니다. 겨울 같으면은 대합실 안에 와가지고서 그 때 시설도 좋지 못한 그 연탄난로에 의존했었고 또 여름이면은 노천대합실이라든지 이런데 와가지고서 자고 있다가 그 차를 이용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이야 국민학생들도 웬만하면은 시계를 갖고 있어서 오히려 교육적으로 안 좋다는 이유 때문에 시계를 차고오지 말라고 이를 정도가 됐지만 집안을 통틀어서 손목시계나 괘종시계 하나쯤 있으면은 제법 사는 집이라고 불렀던 그 때. 통금은 부지런한 이들을 조바심나게 만드는 회초리처럼 밤을 지배했습니다. 골목 저 끝에서 털털거리는 첫 버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야 통금이 풀린 줄 알았던 새벽장사를 나간 사람들은 으레이 허옇게 성에가 낀 겨울 장을 몇 번씩 열어봐야 했고 먼동이 트고 장닭이 울어야 새벽을 알던 시골에서는 30리 장에 일찍 닿으려고 긴 밤을 하얗게 새기도 했습니다. 그래 겨우내 말려온 약초를 몇 번씩 다듬으며 먼 기적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도 했지만 연착이 예사였던 그 때 기차들을 믿는 것은 그리 안전한 방법은 못됐습니다. 어쩌다 기차를 타고 대처 나갈 일이라도 생기면은 마을안에 단 하나 시계 있는 집 구장 집으로 시간을 물으러 가기가 못내 민망해 결국 어린 딸을 보내며 조바심을 달래야 했습니다. 요즘이야 가정부는커녕 파출부 부르기도 쉽지 않게 됐지만 일거리도 품삯도 형편없었던 60년대. 무작정 상경이란 박노식 주연의 이 영화제목 처럼 서울역 광장엔 어떻게든 품을 팔아보겠다고 무작정 단봇짐을 싼 시골처녀들로 붐비곤 했는데 식모라는 이름으로 취직을 한 이들이 시계밥 주라는 주인 말에 진짜 밥 한 그릇을 시계 앞에 갖다 놓았다는 웃지 못 할 일화도 생겼드랬습니다. 그렇게 시계는 귀한 물건이었고 그만큼 시간은 우리가 마음대로 활용하기 어려운 것으로 모두의 일상을 위축시켰습니다. 무자비하게 하루를 단절시키던 통금은 모든 것을 포박해 까맣게 변한 거리는 성한사람과 아픈 사람의 구별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내 손이 약손이라고 앓는 아이의 배를 쓰다듬었지만 끝내 숨결이 거칠어만 갈 때 앓는 딸을 들쳐 업고 갈 곳은 의원이 아니었습니다. 통금은 그 어머니에게 평생 가까이 가기조차 싫어했던 지소로 달려가 앓는 아이 의원에 태워 보낼 경찰 배차나 택시를 마냥 기다리게 했습니다. 하루에 1/4 가까이를 감금했던 무지막지했던 통금은 61년이 되어서야 자정에서 새벽 4시까지로 줄어들었고 64년에는 제주도가 65년에는 충청북도가 통금지역에서 제외됐습니다. 그래 밤의 자유에 목말라하던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의 밤길을 무작정 걸어보기도 했고 통금이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의 경계선이 지나는 곳에서는 그 엄청난 자유의 경계선 위에서 속없는 장난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우리 장호원은 그 도시 약 인구 3만이 사는 도시 복판에 청계천이라는 내가 있어서 이게 도개가 되어 있어가지고 그래서 이 경기도권역에는 통행금지가 있었고 또 충북에는 통행금지가 없었기 때문에 술먹는 사람들이 늦도록 술을 마시다가 통행금지에 저촉이 돼서 못마시게되면은 강북으로 건너가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그래 또 새벽에 돌아올 때는 남의 눈에 일찍 띄게 되니까 나무를 사러 새벽장을 보러 나오느라고 이렇게 핑계를 대고 다녔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조금은 살기가 나아졌다는 60년대. 가게문을 닫는 시간이 오면은 서울의 종로통은 기쁜 소리사니 맥주광고 같은 네온사인과 형광등으로 바뀐 가로등이 조금 더 늘어난 밤의 자유를 빛내곤 했는데 그러나 그 모든 활기조차도 통금 앞에선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세종로통 중부소방서의 막루. 그 높다란 막루에서 밤 11시 반을 알리는 통금 예비 사이렌이 울리면 고단한 하루는 황급히 마감 돼야 했고 귀가 길은 그대로 전쟁이었습니다. 도시의 하루는 늘 그렇게 발을 동동 구르며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싣고 이름 그대로 총알처럼 달리던 총알택시의 횡포 속에 저물어 갔습니다. 그래 어쩌다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추석맞이 시민위안회가 열려도 집이 먼 사람들은 흥이 무르익을 무렵 슬슬 빠져나갈 궁리를 해야 했고 큰 맘 먹고 오페라 표를 샀더라도 집에갈 방도를 미리 손 써두어야만 안심하고 즐길 수가 있었습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온 도시가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그 때. 밤 시간을 차압당한 가장들은 집에 갈 걱정에 일손을 일찍 놓아야 했고 제사조차도 친척들 귀가길 걱정 때문에 혼백이 내려온다는 자정 훨씬 전인 초저녁에 지내버리는 본의 아닌 불효도 불가피했었습니다. 또 한겨울에 느닷없는 폭설이라도 내리면은 통금에 묶여 전화 사정조차 여의치 않던 그 때. 여관 찾기에 허둥대다가 만원여관에 내실이라도 좋아하고 기어들어야 했습니다. 아 그렇게 통금은 우리의 일상을 원격 조종했고 밤은 늘 쫓김과 어두움으로 가득했었습니다. 여름날 그 찌는 판자집 안방에선 견딜 수 없어 골목길에 나와 어쩌다가 눈을 붙이다가도 방범대원과 시비를 가려야 했던 그 때. 경찰서 보호실엔 통금위반자들의 구차한 사연이 가득했고 닭장차라고 자조 섞어 부르던 호송차를 타고 직결심판소로 향하면서도 제주도에서 갓 올라와 통금이 뭔지 모른다는 애처로운 하소도 하고 해외동포인양 서툰 외국어로 시부렁거리다가 들통이 나기도 했습니다. 카메라 플래쉬 앞에서 등을 돌리고 있는 이 숱한 사람들. 그러나 이들의 죄명은 밤늦게 돌아다녔다는 것 하나뿐인데 야경꾼 딱딱이 소리를 피해 이골목저골목 숨어 다니다가 붙들려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 통금이 시간이 닥쳐오면은 항상 불안해서 벌써 열한시대만 넘어도 집에 갈 걱정을 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직장일은 밀려있고 열두시는 다 닥쳐왔고 집에는 가야겠는데 아 뭐 그렇다고 해서 뭐 집에 안들어 가고 여관에서 잘 수도 없고 용두동을 가야겠는데 어떻게 가느냐 그렇다고 골목길로 가면 뭐 방범들 순찰 도는데 걸릴 거 같고 생각 끝에 삼일고가도로를 탔습니다. 타고 쭉 가보니까 참 마음을 졸였지만은 쭉 가다보니까 운이 좋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집에까지 무사히 가고 나니까 그렇게 마음이 좋을 수가 없더군요.”

늘 쫓기는 밤 시간이어서 툭 하면은 시비가 붙고 싸움이 나곤 하던 그 때. 사랑의 종이란 옹색한 단어가 생겨났습니다. 1965년 6월 1일 밤 10시 종로 보신각에는 내무장관과 서울 시장이 나와 청소년들이여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근엄하게 타종을 했고 이미 고인이 된 주선태 같은 배우까지 섞인 청소년 선도위원회가 서울 거리를 행진하는 것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저런 밤 시간의 단축으로 학생들 통학길은 늘 바쁘기 마련이어서 막차를 놓칠까봐 서두르는 여학생에게 사춘기소녀의 부끄러움조차도 잃어버리게 만들곤 했고 어른들도 집에 놀러온 아이들 친구에게 열시가 가까워오면 어서 가거라하고 매정한 축출령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광화문 네거리에서 모두의 허리를 굽히게 만든 이 호외 한 장. 1982년 2월 5일 밤부터 통행금지를 해제한다는 발표하나가 37년이나 감금 됐던 밤을 풀어놓았습니다. 택시를 잡기위한 달음박질이 사라지고 늘 우리를 슬프게 하던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대신 그 자리엔 밤과 낮의 구별을 전자시계 문자판에서만 읽게 만드는 조용한 자율의 모습들이 들어서서 수산시장의 한밤의 활기는 우리의 식탁을 신선하게 하고 서울이건 대전이건 나날의 구별이 없이 이어지는 사람의 물결은 한나절 생활권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만들었습니다.

“통행금지가 해제가 되고나서 지금은 누가 뭐 뭐라고 그래서가 아니라 각자들이 자기의 질서를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가 질서를 지키고 이러므로 해서 전체적인 질서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된 것. 이것을 상당히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뭐래서 타율에 의해서 하던거 보다도 스스로 모든 것을 지켜나가는 어떤 거 민주시민의 보다 높은 차원의 민주시민의 어떤 정신의 근원적인 상황, 의식 구조 이런 것들이 조금 조금씩 자라나고 있다고 하는 거를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될 겁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잊어버렸던 이 변화. 오늘 새벽에도 초봄의 수심을 낚으러 떠난 이들에게선 읽어볼 수도 없을 이 변화는 그러나 겨우 육년의 세월 안에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변화가 으레이 올 것이 왔다고 믿곤 하는 우리들의 망각. 그 차단당한 밤 그 사슬을 풀기 위해 숱한 번민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우리들. 그 타율의 시간들을 한 울타리에 자율로 만든 우리의 슬기는 6년이라는 사이 벌써 가물거리고 있는데 아 지금 우리들의 얘기가 끝날 이때 쯤이면은 벌써 자리를 뜰 생각에 총알택시로 집을 가야될 생각에 혹 늦으면은 방범대원을 피해 어느 골목으로 꺾어가야 할 건가 생각하던 그 때. 우리들 위로 이제 밤안개가 얕게 내려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