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동정

전두환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새로 임명된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과 최영목 내무부장관 그리고 서정화 평화통일 정책자문회의 사무총장에게 각각 임명장을 수여했습니다.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지구 농업용수 개발사업 기공식에 참석한 전두환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우리는 단합과 개척의 정신을 더욱 굳건하게 가다듬어 물 걱정 없는 농사의 여건을 조성하고 과학영농의 정성을 기울여 주곡자급의 국가적 과제를 반드시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화원지구 농업용수 개발 사업은 자연의 재난에 굴함이 없이 피땀 흘려 그 시련을 극복해 온 지역주민 여러분의 굳센 개척의지에 대한 당연한 대가라고 치하했습니다. 이 공사가 끝나면 700헥타르의 농토가 전천후 농경지로 바뀌어 연간 12억 5천만 원의 수입을 더 올릴 수 있게 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여수와 광주시 그리고 진도군을 순시하고 업무현황을 보고받았습니다. 이 자리에서 대통령은 공무원과 각계 지도자들을 자기 지역의 실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주인정신을 갖고 앞장서 봉사하면 지역발전과 주민복지가 괄목할 만큼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도시영세민의 자립을 위해 필요하다면 국유지라도 무상대여 해서 개간토록 하는 방안을 강구해보도록 관계자들에게 지시하고 자녀를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생활기반을 잡겠다는 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빈곤이 다시 되풀이돼서는 안 되겠다고 강조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금년도 제2차 사전협의회 전체회의에 즈음해서 금년 들어 우리 사회 전반에 자율과 명랑분위기가 확산되고 각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공직자 등 핵심집단이 책임의식을 확립하여 선진조국 창조과업을 가속화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경남도청 창원에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긴 지 58년 만에 새로운 중화학공업의 요람지인 창원으로 옮겼습니다. 지난 7월 1일 개청식과 더불어 경남도정의 창원시대가 열렸습니다. 창원의 새 청사는 5만 7천 평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5층으로 연건평이 만 88평에 이릅니다.

경남도민들은 도청소재지 이전을 계기로 이 지방 발전에 대한 부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새 청사에 출근하는 직원들은 웅장한 새 건물에서 근무하는 보람과 함께 도정발전의 기수로 헌신할 결의에 차있습니다.



통한의 33년

동족상잔의 비극 6.25 그로부터 33년 그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이 땅에는 그 쓰라린 상처가 우리의 가슴 가슴마다에 깊숙이 남아 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으로 찾지 못한 저 헤아릴 수 없는 벽보 속에 내 부모 형제는 지금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한국 방송공사가 벌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은 그동안 어쩔 수 없이 체념하고 살아온 혈육의 정을 다시 한 번 온 세계에 메아리치게 했습니다.

얼싸안고 통곡하고 다시 얼싸안고 부둥켜안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 저 광경은 온 세상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사이신가요? 네 제 막내 동생이에요. 네 몇 년 만에? 한 30년 됐죠. 30년요...), (아홉 살 때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종사촌이고 할머니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구요...), (1.4 후퇴 후에요. 그다음 날 8월 15일쯤에 명절날에 나왔습니다.)

어릴 때 헤어져 얼굴도 모르는데다가 30여 년이 흘러 아버지 어머니가 타계하신 분도 많아 헤어져 산 한은 더욱 북받쳐 올랐습니다.

공산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혈육의 이별 부모를 잃고 헤매는 저 어린 형제, 눈보라 치는 흥남부두의 피난길은 1.4 후퇴의 쓰라림을 다시 한 번 웅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혈육의 재회는 기약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한강 얼음 위를 걷는 피난 행렬에서 부모·형제 처자를 돌볼 겨를이 없어, 열차에 올라 피난길에 올라 흩어지는 가족들이 그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저 폐허 위에 고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과 남은 저 부인, 어버이를 잃은 어린아이들의 애절한 울부짖음이 지금도 귓전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성도 바뀌고 이름마저 달라져 흉터만을 확인하고 어릴 때에 헤어진 기억을 더듬어야 겨우 혈육임을 알아 낼 수가 있었습니다. (학교 2학년 다녔지? 언니는 만울 학교 다니고. 또 언니 있지? 정숙이.. 엄마 있고? 진짜 언닌가? 응 너.. 진짜 언닌가? 응), (야 너 저기 여기.. 할머니.. 아버지가 할머니 업고 누나가 나 업고 형 둘하고 갯바닥으로 넘어가서. 맞았어. 잃어버렸어. 무슨 길 어디서 잃어버린 줄 모르지? 몰라. 응? 모른다고. 모르지? 그럼 네가 내 동생 맞아, 수남인데...), (내가 저 순옥이여. 어 그랴, 맞아요? 어야 나 정래다! 정래요? 그래! 그러면 이름도 불렀지? 그래! 맞아요? 그래 아버지 이름 조기사이고. 너 이제 아니? 네 아이고 아버지! 아~ 오빠!), (보고 싶었어요. 얼굴도 모르는 오빠를 정말...) 누가 우리를 이렇게 헤어지게 했습니까? 이번 이산가족 찾기는 7월 7일 현재 천 4백여 가족을 재회시켰습니다. 우리는 지난 71년 8월 12일 남북적십자 회담을 북한 측에 제의한 데 이어 조총련 동포의 모국방문을 허용했으며 중공과 소련 땅에 거주하는 동포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고 있습니다. 그라나 북한 공산집단은 6천만 동포의 이 아픔도 외면한 체 권력세습강행과 폭력적 적화통일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현실적이고 정당한 민족화합, 민주적 통일방안 제의마저 거부함으로써 영원히 씻을 수 없는 민족사의 죄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로써 그들을 대화의 광장에 나오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산가족 찾기에 적극 호응해서 한 가족이라도 더 피맺힌 상처와 고통이 아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