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줄곧 남의 도움만 받아온 우리, 그러면서도 늘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우리 내일을 모르고 오늘의 삶에만 쫓기던 우리는 제 3공화국의 탄생과 더불어 지난날의 안이했던 생활태도에서 벗어나 조국근대화를 위한 건설의 역군으로써 손에 손에 팻말을 들고 나섰다. 지난 5년 동안 우리가 허리띠를 졸라 매고 일한 보람은 컸다. 기간산업 개발에 놀랄만한 성과를 이룩해 여기 우리의 꿈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이다. 62년도에 국민소득이 11,269원인데 비해 65년도에는 23,986원으로 뛰어 올랐다. 그러나 국민의 6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국민소득 중 농업생산이 차지하는 비율은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됐다. 그래서 정부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더불어 증산에 크게 힘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증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때맞추어 알맞은 비료를 주어야 하는 것이므로 해마다 비료의 수요가 늘었으나 비료 생산량이 극히 적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는데 이것이 증산에 큰 지장을 주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도별 비료 수입 상황을 보면 해마다 화학비료의 수입액이 5천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당시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을 훨씬 상회했었다. 1962년부터는 정부의 수출 진흥책으로 전체 수출액이 엄청나게 늘어났으나 증산을 위한 화학비료의 도입은 여전히 계속됐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비료공업을 살펴보면 61년도에 연산 5만 톤의 시설규모를 갖춘 충주비료가 건설됐다. 그런데 충주비료는 6만6천6백 톤으로 그 시설규모를 확장했다. 다음해인 62년도에는 충주비료와 같은 규모의 호남비료가 건설되어 비료의 국내생산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러나 이로서도 막대한 국내 수요량을 충족하기에는 요원한 것이었다. 65년도만 하더라도 충주비료와 호남비료는 국내 질소질 수요량의 겨우 31.5%를 충당했을 뿐, 그 부족량과 인산질 가리질은 외화 7,400만 달러를 들여 수입해야만 했다. 증산을 제 1목표로 내건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드디어 비료공업의 확장에 착수했다. 65년 7월 진해에 제 4비료공장을 착공, 67년 4월에 준공을 목표로 공사를 서두르고 있다. 이 공장이 완공 되면 질소질 7만2천 톤, 인산질 5만5천 톤, 가리질 2만 톤을 생산하게 될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울산에 다시 제 3비료공장이 기공되어 67년 4월에 그 준공을 보게 됐다. 이 공장에서도 질소질 7만2천 톤, 인산질 5만5천 톤, 가리질 2만 톤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나 이로서도 해마다 격증하는 국내 비료의 수요를 충당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여기 공업도시 울산에 다시 대규모의 비료공장이 착공됐다. 지난 65년 11월에 착공, 66년 말에 완공을 보게 될 이 한국비료는 단일 화학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로서 연간 요소 33만 톤, 질소질 15만8천 톤을 생산하게 될 것으로 이것은 국내비료 총생산량의 40.6%를 차지하는 것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뒷받침에 힘입은 각 공장의 건설은 빠른 진척을 보였으며 이러한 비료공장들이 가동하면 그 막대한 국내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아돌아 해외로 수출하게 될 여력을 갖게 됐으니 정부가 힘들여 추진한 비료공장의 확장은 완전 성공, 이로써 우리의 오랜 숙원인 비료자급의 꿈은 드디어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증산에 특히 깊은 관심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비료공장의 건설 상황을 두루 시찰하고 빠른 시일 안에 완성할 것을 당부하면서 산업 전사들을 격려했다. 이밖에도 정부에서는 운휴중인 삼척산업과 경기화학의 복구 그리고 풍농비료와 고려비료 등 민간공장의 건설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비료공장의 건설로 68년도에는 국내수요가 337,100 톤으로 늘어나는데 비해 각 비료공장에서 374,000 톤을 생산할 수 있게 됨으로써 잉여비료는 수출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농업국가인 우리나라의 경제구조에서 가장 긴요한 비료공업에 눈부신 발전은 농업증산을 크게 뒷받침 할 것이며 지금 정부에서 강력히 추진하는 식량증산 7개년 계획과 더불어 1971년에는 식량의 완전자급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힘겨운 팻말을 휘두른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눈에 보이는 뚜렷한 수확을 얻었다. 앞으로 5년 우리는 다시 건설에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후손에게는 번영된 조국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