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해 있던 체신사업을 혁명 후 정부는 체신강화 특히 농어촌에 많은 체신시설을 확장했습니다. 편지 한 장을 보내기 위해서 수십리 길을 나와야 했던 농어촌민을 위해서 정부에서는 불과 1년 반 동안에 농어촌 우체국 387개소를 새로 설치했을 뿐만 아니라 농어촌에 전화 시설을 많이 가설했으며 도시의 인구와 늘어나는 산업시설에 대비해서 보다 많은 전화시설을 늘리고 또 개선했습니다. 한편 지금까지 없었던 무선 전신 전화망은 육지와 섬 그리고 바다 위를 달리는 선박에 설치해서 전화도 하고 전보도 칠 수 있도록 하여 통신망에 현대화를 기했습니다.

지난날 열차내의 모든 불량배와 잡상인들을 일소하고 연착 또는 연발을 일삼던 열차운행을 시정 정시에 달리도록 했으며 승객 중에 환자를 대비해서 긴급 의료시설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파괴된 대로 방치해 두었던 역사를 복구하고 정비했으며 서울역과 대전역에는 노천 대합실을 만들어 승객의 편의를 도모했습니다. 철도 건설을 본다면 경포대와 옥계를 연결하는 동해 북부선이 개통되었고 건설 중인 철도는 황지선, 정선선, 경북선이며 능인선은 이미 개통되었습니다. 이렇듯 많은 철도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정부는 외국에서 사들어 와야만 했던 나무 침목을 국산 콘크리트 침목으로 대치하여 막대한 외화를 절약했으며 이에 따라 전국 방방곡곡에도 기차가 달릴 수 있도록 철도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한편 지난날 정치적인 압력과 이권 투쟁으로 방치되어 온 인천 공작창을 활발히 운영한 결과 혁명 후 불가 1년 반 동안에 하차 1,179량을 재생했고 객차 1,020량을 새로 만들었으며 구정시 버려두었던 14량의 증기기관차를 재생하고 기관차는 거의 디젤기관차로 대체했습니다.

이것이 구정하의 도로 사정이었습니다. 많은 도로 공사비는 엉뚱하게도 부패 정객들에게 점령당하고 말았으니 길은 끊어지고 교통은 마비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이러한 부정을 일소하고 김포와 서울간의 도로 공사를 위시하여 많은 도로를 개척함으로서 전국에 있는 실업자에게 일터를 주게 하고 나아가서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쏟아져 나올 수송품을 수송하는데 만전을 기하게 되었습니다. 나날이 뻗어가는 우리의 국토, 이것이야 말로 보람된 내일을 위하여우리가 가야할 길이라 하겠습니다.

또 하나 서울에는 제 2한강교 신설공사가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재 김포에서 서울시청까지 들어오는 길이 실로 16킬로미터나 되어 교통의 폭주로 상당한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것인데 제 2한강교가 완성되면 그 거리가 4킬로미터나 단축되어 많은 불편을 들어주게 될 것입니다. 이 밖에 전국적으로 건설 완료 또는 건설 중에 있는 도로와 교량의 건설 상황을 본다면 먼저 도로 건설 사업으로 서울이 62킬로, 경기도 57킬로, 강원도 97킬로, 충북이 24킬로, 충남이 172킬로, 경북이 106킬로, 경남이 94킬로, 전북이 35킬로, 전남이 55킬로, 제주가 35킬로미터로 총 737킬로미터에 달하고 있으며 한편 교량의 건설은 총 236개소의 달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경치가 좋아 관광사업의 비중이 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위증자들은 미약한 시설과 선전부족으로 외국의 관광객을 맞아들이는데 소홀히 하여 마땅히 벌어들일 수 있는 외화도 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혁명정부는 모든 문화재와 시설을 보호하고 개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날 종이 공간으로 사용하려든 조선호텔을 관광산업에 이바지하도록 하여 그 시설을 현대화 하여 연간 30만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3100만원의 외화를 벌어들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관광호텔 건설 5개년 계획을 보면 기존년도 1100실이 5년 후에는 2400실이 늘어나게 되어 많은 관광객을 맞아들일 수 있는 진행이 착착 되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 교외의 워커힐이라는 광광시설이 1962년 12월25일 개관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는데 이 건설의 규모는 6억원의 예산으로서 19만평의 대지에 현재 36개 건물이 건설되어 관광한국의 면모를 새로이 하고 있습니다. 이 워커힐이 개발되면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유엔군과 외국인은 물론 멀리 외국의 관광객까지도 불러 들여서 연간 6천만원이라는 돈을 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혁명 후 우리나라에는 놀랄 만큼 많은 주택이 건설되었는데 도시의 주택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울을 비롯한 주요도시에는 많은 아파트가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주 남원 등지에는 많은 수해복구 주택을 건설해서 난민들을 입주시켰습니다. 한편 획기적인 사실은 원호처를 설치한 것이며 이 원호처에서는 지난날 나라를 위해 불구자가 된 자들이며 애국자의 유자녀를 돌보아주고 있으며 주택을 지어 중상위 용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에게 취직을 시켜 따뜻한 손길을 뻗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체신부를 통하여 지불하던 연금을 혁명 후에는 대상자에게 보다 빨리 지불하기 위하여 농업 협동조합을 통하여 밀렸던 연금도 속속 지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원호처에서는 경기도 수원에 아동보육소 농사교도소 직업교도소 양로소 등으로 구성된 중앙원호원 설치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한편 불치의 병으로 알려진 나병환자들에 대해서 혁명정부는 현대의 학의 좋은 약품을 도입하여 최선을 다한 결과 나병은 치료할 수 있다는 실정을 얻게 되었으며 이 놀라운 사실은 오늘날 우리사회의 명랑한 화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혁명정부의 보건 시책은 지난날과는 달리 치료 반을 동원전국을 순회하여 각종 전염병 예방 활동을 전개했으며 의사 없는 마을 없애기 운동을 펼쳐 어떠한 두매 산골에도 보건 진료소와 병원을 설치했습니다.

한편 실업자들에게 일터를 주어 새나라와 함께 새 생활을 할 수 있게 전국 도처에 직업안전소를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나날이 밝아오는 새날을 맞이해서 오랫동안 천대받던 근로자들도 정부에서 마련한 아담한 노동회관에서 보다 힘찬 내일의 재건을 위하여 하루 단돈 5원으로 안정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구호품의 행취로 말썽 많던 양로원이나 고아원에는 오늘날에는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이나 고아들에게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뻗쳐 명랑한 사회분위기를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혁명 후 우리나라 교육에도 일대 혁신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학원에서는 오랫동안 군기가 근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힘들인 것은 기술교육의 진흥이었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급 학교에서는 1인 1기 교육을 실시하게 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기술자와 직업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실업계 대학의 확충과 시설의 정비 등 힘찬 노력을 기울인 결과 많은 실업계 초급대학이 설립되고 학생의 수도 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