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분단 초기 공장이 많던 북한과는 달리 38선 이남에는 재래식 농촌이 많았습니다. 지역마다 닷새마다 하루씩 서는 5일장 향수에 젖게 하는 우리 모두의 고향입니다. 악몽과도 같은 6.25 전쟁 동족상잔의 비극 남부여대하고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겨울에는 대중가요에서 금순이도 울며 헤어진 흥남철수 한 많은 1.4후퇴가 있었고 서울은 또 한번 유린당했습니다. 3년에 걸친 전쟁과 피난살이.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주요 간선 도로에 전차가 다니던 서울 그때인구는 고작 170만 명 정도였습니다. 드럼통에 철판을 오려 입혔을망정 우리 손으로 버스도 만들어서 타고 다녔고 6.25 직후부터 관광버스가 등장했는데 그 당시는 명물이었습니다. 국산 시발택시가 등장한 것이 1957년 무렵이었습니다. 여름날의 피서행락 주로 한강과 광나루 정릉 계곡 같은데서 수영복도 입지 않고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50년대 말 추억속의 종로 야시장 거리입니다. 서울시민 빙상대회를 수록한 1956년의 대한뉴스는 넥타이에 중절모를 쓴 신사차림의 선수까지 보여줍니다. ...국민 건강을 위해 전국적으로 국민체조가 보급됐습니다. 문맹 퇴치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서 대학 제복에 학생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1957년도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미인을 뽑는 기준도 지금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루이 암스트롱과 같은 세계적인 인기연예인들의 방한공연이 있었는가 하면은 재건국민운동 정신에 따라 대한뉴스가 짧은치마입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바람이 크게 불었습니다. ...제1회 우량아 선발대회에서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어린이가 튼튼한 어린이로 뽑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해마다 봄철이면은 넘어야 했던 보릿고개를 잘 넘기기 위해서는 보리를 밟아줘야 했습니다. 공무원과 학생들까지 참여한 가운데 치루어진 농촌의 큰 행사였습니다. 70년대 중반 한때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 단속 대상이 되기도 했던 장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