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럭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달은 칼과 활을 비치는구나. 이 칼을 두고 읊은 충무공의 시 그리고 이 칼에 서린 충무공의 맹세 우리 그 맹서로서 나라를 구원해낸 충무공의 업적 그 업적과 은공을 천추에 전하기 위해 뒷사람들이 여기 사당을 짓고 공의 혼령 앞에 제사를 받들어 왔다. 그동안 여기 현충사는 충무공의 위업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초라한 사당만이 유지되어 왔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기 현충사를 민족혼의 상징으로 받들고자 해마다 여기를 참배하고 이곳을 성역화하기로 결정 현충사 경관사업을 이루게 된 것이다. 원래 이곳은 서기 1707년 충무공이 순직한 지 109년 뒤 숙종대왕이 친히 현충사라는 이름으로 현판액자를 내려준 뒤 수백 년 동안 Err_Code(1:44) 끊이지 아니했다. 역사는 흘러가되 민족의 가슴마다에 새겨져 있는 충무공의 정신 내 국토 위해서라면 물불 속으로도 뛰어 들고 내 동포 위해서라면 총칼 앞에서라도 달려드는 그 정신만이 나라를 살리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무공의 호국정신이요 그 정신 받드는 곳이 이 현충사라 여기는 과연 거룩한 민족의 정신의 도장인 것이다. 그가 마시며 자라난 이 우물은 세세대대 마르지 않았다. 자손과 동네 사람들이 모두 이 우물물을 마셨고 이곳을 찾는 이들도 여기에 와서 이 물을 마셨다. 저 말달린 곳이 바로 저 언덕이요. 활 쏘던 곳이 이 나무 밑이라 여기에 오면 그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그의 옛 집터에 발을 머물면 그 아버지의 별세한 소식을 듣고 먼 함경도로부터 달려온 것이 여기요. 또 공을 시기한 원종의 모함과 처절한 당파싸움의 재물이 되었다가 백의종군으로 감옥에서 나오던 길로 그 어머니의 관을 붙들고 울던 곳도 여기였기에 인간 충무공을 그려보며 한 가닥 슬픈 감회조차 금치 못한다. 한민족의 위대한 인물이 끼친 유물이나 유적은 떨어진 부스러기 하나 깨어진 돌 한조각도 귀하지 않은 것이 없나니 거기서 그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고 거기서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유물가운데서도 가장 귀중한 것은 임진란 7년 동안에 전쟁 중에도 집필했던 난중일기 7책이다. 어떠한 전문 서가라도 미칠 수 없는 명필 친필의 필체 간결하고도 곡진하고 진실한 피 눈물 된 그의 문장 임진년 6월 초닷새 아침에 떠나서 고성 당항포에 이르니 왜군의 큰 배가 한척 중간배가 12척 작은 배가 20척이 아닌가 한꺼번에 무찔러 깨뜨리면서 비 오듯 화살을 쏘아부친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다. 충무공의 함대는 백전백승 천여척의 왜적 함대를 남쪽바다의 고기밥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충무공에게 있어서 여수는 참으로 고국 영웅으로서의 출발지였다. 여기 진남관에서 해군 장병들을 훈련했었고 여기서 모든 병기를 수거했으며 또 여기서 그 유명한 거북선을 소생하고 건조하기에 성공한 곳이다. 그러기에 전쟁이 끝나고 충무공이 순국한 뒤 공의 공을 찬양해서 사당을 세운 곳도 여수의 Err_Code(5:21) 가 가장 처음이었고 그의 공적을 세운 비석도 이곳에 세운 통제이공수군대첩비가 가장 처음이었다. 임진란이 일어난 다음해 충무공은 왜적의 배들이 서해를 거쳐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기 위해 통제영을 한산도로 옮겼다. 지금도 제승당 뜰에 서서 그날을 추상해 보면 나라가 온통 무너진 속에서 병기도 군량도 군복도 다만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했던 충무공의 애통한 모습을 눈앞에 떠오른다. 비바람 부슬부슬 잠 못 드는 밤 생각만 가물가물 잠 못 이루고 쓸개가 찢기는 듯 아파오는 이 가슴 살을 베이는 양 쓰린 이 마음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새들 들새들도 슬피 우노라. 나라는 허둥지둥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거기 한산도 앞바다에서는 충무공이 학 날개 진법을 벌여 왜적들의 함대를 모조리 무찔러 버렸던 것이다. 여기 대대로 깃든 저 학들이야 말로 그날의 승리를 지금도 우쭐거리는 듯하다. 충무에 있는 세병관은 충무공의 군기를 정리하고 출전준비를 갖추었던 곳이라. 지금도 뜰에 서서 눈을 감으면 그의 산천을 울리던 서릿발 같은 호령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이곳의 충렬사는 충무공을 제사하는 사당으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사당이다. 그래서 충무공 앞으로 보내온 그 당시 명나라 친종황제의 8가지 하사품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겨우 12척의 배로 530여척을 월동의 바다 속으로 밀어 넣었던 명랑대전 나라의 근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지금도 이 비각의 돌기둥에서는 땀이 흐른다고 한다. 왜적은 싸움에 지고 물러갔으나 마침내 우리는 그들의 종이 되어 40년 사슬의 허덕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충무공을 또, 한번 우러러 보며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충무공의 얼을 받던 지도자와 국민이 한 마음 한뜻으로 조국을 수호하고 민족중흥의 구호를 지어 우리의 숙원인 국토통일과 조국번영의 그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남해바다 저 물결 넘실거리는 남해바다 임진란 7년을 소용돌이 쳤던 남해바다 새벽하늘의 큰 별 하나가 빛을 잃고 잠기던 남해바다 어서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내가 죽었다고 떠들지 말고 어서 나가 싸워라 마지막 눈을 감던 그 순간까지 오직 나라만을 생각하던 충무공의 정신이 깃던 남해바다다. 충무공이 가신 뒤 긴 세월이 흘렀다. 그의 육신은 고이 잠들고 계시지만 그의 정신은 이 나라의 역사와 함께 우리 겨레의 혈관 속에 면밀히 전해오고 또 전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