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경상남도 울산, 한없이 펼쳐진 곡창지대를 유유히 흐르는 이곳 태화강변에 민족번영의 상징으로서 새로운 공업도시가 탄생됐습니다.



조국의 횃불

-울산공업지구-

1962년 1월 27일 울산이 특정 공업지구로 결정·공포되고 그해 5월 30일에는 읍 소재지에서 시로 승격됐습니다. 그리고 1962년 2월 3일 마침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울산공업센터 건설의 깃발을 세웠습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손만대의 번영을 약속한 민족적 궐기로 울산에 신생공업도시를 건설하고 독일 Err_Code(00:52)기적을 넘는 신라의 영화를 재현시켜 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언 6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쉴 줄 모르고 일한 결실이 나타났습니다. 수많은 공장은 준공식을 마치고 조국근대화에 앞장서는 횃불처럼 울산 창공에 검은 연기를 내뿜게 됐습니다.



허허벌판 위에 불과 5년 만에 세워진 공장들, 공업한국의 요지로서 울산이 이렇게 발전된 것은 무엇보다 그 입지적 조건이 좋았습니다. 기후는 온화하고 바람의 방향이 연중 90% 이상이 서북풍이어서 공업지구의 공기문제 해결에 큰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교통이 철도가 부산, 대구, 서울로 연결되고 삼면이 해상으로 해외 국제항구와 직접 연결되며 공장지대의 지질은 기초 작업이 매우 용이하게 되어 있고 공업입지상 가장 중요한 공업용수도 태화강을 끼고 있어서 어느 지역보다 풍부한 수원을 확보할 수가 있습니다.



하루의 일은 아침출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현재 울산시 인구는 12만 3천여 명으로 전국 시 중 10번째입니다. 울산은 그 옛날 신라 시대부터 일본과의 교역 항으로 알려져 있고 고려 때는 울주라고 했다고 이조 태종 때부터 비로소 울산이라고 불려 왔습니다. 그리고 주민의 생업은 주로 농업과 어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농사를 짓고 보릿고개를 걱정하던 이곳 주민들은 이제 새로운 일터를 마련해서 공업도시 건설의 역군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긍지를 갖게 됐습니다.



여기는 정유공장, 산업구조상의 후진성을 탈피하고 제2차 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도모해서 자립경제를 이룩하려는 제1차 5개년 계획은 우선 에너지의 원활한 공급이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1962년 2월 26일 정유공장 건설안을 의회에서 의결하고 1963년 3월 12일에 이곳에 착공해서 동년 12월에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정유공장은 당초에는 하루 3만 5천 배럴의 원유를 처리해 오다가 국내 유류수요의 증가에 따라서 1967년 7월 5일부터는 5만 5천 배럴로 시설을 확장하고 다시 1968년부터는 11만 5천 배럴의 원유를 처리할 수 있도록 공장규모를 확장시켰습니다.

생산된 유류는 국내 민간수요는 물론 군납까지 담당하고 있는데 육상부분 30%를 철도와 트럭으로, 해상선박으로 70%를 수송하고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20세기 후반기는 바야흐로 석유시대라고 할 만큼 에너지의 근원과 화학공업의 모든 원료를 석유에서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석유화학공업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그에 종용해서 앞으로 정유공장 시설확장은 계속해서 추진될 것입니다.



여기는 연간 33만 톤의 당일 요소비료의 생산능력을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한국비료공장입니다. 한국비료의 주요 시설로는 하루 590톤의 생산능력을 가진 암모니아 공장과 하루 천 톤을 생산하는 요소공장이 있으며 동양 최대의 만 평 창고라는 무려 9만 톤을 저장할 수 있는 창고도 있습니다. 다음 본 공장은 평균연령 27세라는 젊은 기술진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으며 직원을 위한 현대식 삼 층 독신용 225동의 독립사택, 종합병원 등의 복리시설도 완비시켜 놓았습니다.



이곳은 또 하나의 비료공장인 영남화학공장입니다. 이곳에서는 요소비료 8만 4천1백 톤과 복합비료 18만 8백 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특히 복합비료는 우리나라의 토질 및 유한비료의 평균시용으로 인한 폐단을 시정하고 복합비료에 의한 질소, 인산, 칼리에 의한 시비로 연간 무려 350억 원에 달하는 농작물의 증수를 가져오게 해서 농업생산성의 향상과 과학화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한국비료와 영남화학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에 전국적 비료생산량은 118만 톤인데 이 중에서 울산에서 생산되는 것만도 그 반이 넘는 59만 1천여 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엑슬란 화학사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엑슬란 화학사를 만드는 동양합섬공장입니다. 1967년 4월에 준공을 본 동양합섬은 하루에 부녀복 2만 9천 벌에 해당하는 6톤의 엑슬란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양모보다 가볍고 따뜻하며 염색성이 우수해서 색채가 선명하고 퇴색하지 않는 이 엑슬란 화학사의 원료는 물과 공기 그리고 석유입니다. 내의, 속옷, 모포, 스웨터, 생사 등 섬유계의 새로운 총아로 등장한 엑슬란 화학사는 그 수요가 날로 늘어나서 석유화학공업과 함께 얼마든지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는 동양화학공장입니다. 재일교포에 의해서 세워진 동양화학은 각종 비닐 가공품을 만드는 원료인 PVC를 연간 6천6백 톤, 가성소다 9천 톤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가성소다는 유지, 염료, 식품의학, 석유제로 사용될 기초과학 원료입니다. PVC는 합성수지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PVC 시대라고 부를 만큼 그 수요가 나날이 증가되고 있습니다.



정유공장의 건너편에 또 하나 새로운 공장이 1968년 7월 16일에 준공을 보았습니다. 동양 나일론 공장이 그것으로써 이곳에서는 하루에 나일론사 7.5톤, 나일론 코트지 3톤을 생산하는데 이는 의류용 일반 나일론사, 어망사, 강력 나일론사, 타이어 코드 용 강력 나일론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 최초며 하나밖에 없는 본 공장의 제품생산으로써 우리는 연간 5백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하고 수출로써 17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게 됐으며 약 천여 명의 고용증대에도 이바지하게 됐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태껏 보아온 바와 같이 1차 5개년 계획으로 울산에는 수많은 공장이 완공됐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 계속사업이나 2차 5계년 사업으로 새로운 공장 건설이 활발히 진척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1969년 5월 가동목표로 내·외자 53억 원을 투자해서 공사 중인 한국 알루미늄 공장입니다. 영남화학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조선비료공장이 1968년 12월 가동을 목표로 공사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연간 10만 톤의 요소가성비료를 생산할 것인데 이는 특히 연초, 상전, 삼림, 목초, 과수, 소채 등 수익성 높은 특수작물 재배에 유익하게 쓰여 농가소득을 올리는데 크게 공헌할 것입니다. 여기는 1969년 9월 준공목표로 부지를 정비작업 한 한국Err_Code(10:26)비료공장입니다. 미국의 포드회사와 기술제휴로 건설 중인 현대자동차 공장도 완공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1968년 말부터 각종 차량을 만 대 내지 만 오천 대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1968년 3월 22일 울산에서 석유화학단지 기공식이 화려하게 거행됐습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중 중요 산업의 하나로 책정된 석유화학공업은 이곳 1백만 8천 평의 부지 위에 외화 1억 8천2백만 달러, 내자 323억 4천만 원을 투자해서 납사분해시설과 11동의 계열공장을 1970년까지 완공, 3천여 명의 고용증대와 함께 연간 약 300억 원에 해당하는 각종 제품을 생산, 연간 약 7천만 달러의 외화를 절약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잡초만이 뿌리뿐인 이곳에 머지않은 2년 후 신기루 같은 공장지대가 새롭게 단장되는 것입니다.



제2차 5개년 계획에 접어든 울산, 여기 그 투자계획이 있습니다. 석유화학공업에 507억 5천만 원, 연관공장 건설에 317억 1천만 원, 발전시설에 197억 5천만 원, 항만건설에 37억 2천만 원, 공업용수에 53억 7천만 원, 도시토목에 40억 원, 철도에 5억 원, 기타에 10억 원이 투자돼서 선진공업도시로 발전될 것입니다.



공업센터로서의 규모를 갖추자면 그 지원시설이 충실해야 합니다. 울산공업지구의 전원개발을 보면 총 시설계획량이 99만 킬로와트인데 그중에 15만 4천 킬로볼트의 변전시설이 완공됐고 발전시설로는 15만 킬로와트의 울산화력이 준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1967년 3월에 기공한 영남화력발전소는 1969년 12월에 완공돼서 40만 킬로와트를 발전하게 되고 장차 70만 킬로와트로 시설을 확장할 계획입니다. 또 하나의 전원개발로써 연 44만 킬로와트를 발전할 민간발전소로서는 처음인 동해전력의 공사현장입니다.



공장건설에 자재도입과 생산품의 수송을 위해서 부두시설의 정비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현재는 이미 완공된 제1부두에서 우리나라 처음으로 2만 톤급 선박이 저반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항만에서는 세 척의 준설선을 동원해서 준설작업도 하고 있는데 항내 수심은 7~12미터입니다. 준설작업으로 생긴 준설 토는 영포, 장생포 지구에 매립돼서 65만 평의 새로운 공업용지까지 조성시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고 있습니다.



공업지구에는 충분한 공업용수가 반드시 확보되어야 합니다. 울산의 공업용수는 1971년까지 하루 평균 52만 톤을 개발할 계획인데 1968년 현재는 12만 톤이 공급되고 있습니다. 여기는 공업지구에서 18킬로미터 떨어진 사암 댐입니다. 총 저수량은 2천5백만 톤으로 하루 10만 톤의 공업용수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정유공장 기공과 더불어 가장 앞서 개발된 태화강 취수탑으로 하루 2만 톤의 공업용수를 취수하고 있습니다.

공장지구에서 가까운 이곳 사암 댐은 유휴 저수량이 150만 톤으로 송수관 고장으로 본 댐과의 송수가 막혀도 15일간 공급이 가능한 대비 댐입니다. 여기는 대암 댐 건설현장입니다. 미개발 공급용수 40만 톤 중에서 이곳이 완성되면 5만 톤의 공업용수가 공급되며 나머지 35만 톤은 낙동강에서 취수해 이곳 대암 댐에 인수,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의 제1차 5개년 계획 중 투자된 자금을 살펴보면 공장건설에 360억 원, 공업용수에 13억 5천만 원, 항만 건설에 12억 5천만 원, 도로·교량 건설에 6억 6천만 원, 철도건설에 1억 5천만 원, 전신전화 사업에 1억 3천만 원, 기타사업에 4억 6천만 원이 투입됐습니다.



나날이 번창하는 공장건설에 발맞추어서 울산시의 살림도 그 규모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울산시정의 목표는 첫째 도시개발촉진 둘째 시민소득증대 셋째 복지기반조성 넷째 대공태세강화입니다.

여기는 울산시의 가장 위업적인 성업의 하나인 토지구획정리사업장입니다. 50만 인구규모의 계획적인 새로운 울산의 표준임하도시를 건설하는 사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토지를 증대하고 구획정리를 하며 새로운 시가지를 개발하고 상하수도 시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연도별 구획정리계획을 보면 1963년에는 19만 평, 66년 19만 평, 67년에 18만 평, 68년 24만 평, 69년 20만 평, 70년 22만 평, 71년에는 나머지가 정리돼서 새로운 표준임하도시가 될 것입니다.



무주택 시민들의 주택난 해결을 위해서 1968년에는 1천 동의 주택을 건립하고 872동의 초가를 기와집으로 개량하고 특히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는 도로 노선별, 지역별로 구분해서 규격과 높이, 구조, 색채, 방향 등도 통제해서 전체적인 도시모습을 아름답게 꾸밀 것입니다. 주택건설은 제1차 5개년 계획기간 중 1,816동을 지어서 기존 주택과 함께 1966년 말에는 1만 3천6백 동이었는데 2차 5개년 계획 중에는 다시 8,388동을 지어서 1971년도에는 2만 1천9백38 동이 되어 모든 시민이 주택을 갖게 할 것입니다.



국도와 연결하는 도로나 새로운 산업도로를 개설하고 포장하며 미화작업을 하는 것은 신흥 공업도시로서 시급한 사업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1971년까지 133.9킬로미터의 새로운 가로를 개설할 계획에 있으며 총 14억 원을 투자해서 80킬로미터의 가로를 포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로 중심과 양측에는 꽃과 나무를 심어서 시민의 정서생활을 위한 도로공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연차별 가로축조와 가로포장의 실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주색이 새로운 가로를 축조한 연도별 누계고 흰색은 연도별 가로포장계획, 녹색은 가로포장의 누계입니다. 즉 1971년에 가면 무려 133.9킬로미터의 가로가 생기고 80킬로미터의 가로포장이 완료될 것입니다.



여기는 하수도사업공사장입니다. 당시의 계획은 1971년까지 총 4억 4천8백여만 원을 투자, 총연장의 34%인 94.4킬로미터의 하수를 개수할 것인데 1968년에는 9천 6백30미터의 하수구를 개수해서 내 고장의 위생환경을 개선했습니다. 이러한 하수구 사업은 1962년에는 겨우 울산시 중 7%밖에 안 되어 있던 것이 1차 5개년 계획이 끝나자 약 20%까지 완료되고 이것을 2차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는 도시의 확장과 더불어 약 70%까지 완료시켜 울산이 근대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는 상수도공사현장입니다. 시민 문화생활의 기본이 되는 상수도는 늘어나는 인구에 따라서 그 사업규모도 방대한 바 있습니다. 1967년 현재 시민 급수량은 1인당 86리터인데 1971년까지는 190리터로 배로 늘리기 위해서 2개소의 정수시설과 84.8킬로미터의 송·배수관을 설치한바 이에 소요되는 예산은 7억 5천9백만 원을 투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수도 개발계획을 도표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67년도는 상수도 공급이 시민의 27%밖에 안 됐는데 앞으로 1971년에 가면 80%를 공급해서 모든 시민이 수도의 혜택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기간산업이 진행됨과 더불어 당 시에서는 중소기업의 육성에도 결코 소홀하지는 않았습니다. 중소기업 육성책으로는 32개 업체에다 4,560만 원의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어민들의 소득증대 책으로 수산센터 건립, 어선 건조 등도 추진, 그 옛날 강어진의 호경기를 되찾게 하고 있습니다.



도시민의 소득증대와 함께 당 시에서는 도시와 변두리의 농어민과의 소득차이를 없애고자 농가에는 수익성 높은 고등소채, 딸기, 양계단지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후 수출산업의 육성책으로 밍크사육에도 착안, 1966년에는 200여만 원을 투입해서 720수에서 71년에는 2만 수까지 늘려서 연간 139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일 것입니다.

예부터 맛좋기로 이름난 울산 배는 공업지구의 편입으로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175정보의 단지를 보유하고 연간 순이익 4,200여만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기는 과학기술센터로서 경제건설의 역군인 기능공 천여 명을 집단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복지사업으로 당 시민 172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목욕실, 이발소, 식당, 연회실을 갖춘 근로자 합숙소도 지어서 저소득 근로자의 권익 보호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나날이 번창하는 울산, 여기 매년 늘어나는 인구통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961년의 울산인구는 불과 8만여 명밖에 안 됐습니다. 그러나 1967년에는 당시의 약 2배로 늘어났던 것입니다.



울산에 있는 기업체의 연도별 생산액을 과거와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1962년에는 19개 업체에서 겨우 2억 원의 생산을 냈는데 이것이 1차 5개년 계획이 끝난 1967년에는 무려 기업체는 43개로 늘고 208억 원의 생산액을 보여주게 됐습니다. 그리고 1968년 말에는 500억 원의 생산액을 낼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을 다짐해 주었습니다.



울산이 어느 정도의 공업도시로 변했는가를 알 수 있는 도표가 여기 있습니다. 즉 1962년의 울산은 농업부분인 1차 산업이 62%였고 공업부분이 13.5%뿐이었는데 66년에는 1차 산업이 12.4%로 줄고 2차 산업이 64.9%로 늘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에는 무려 1차 산업이 8.3%뿐인데 반해서 2차 산업은 76.1%로 늘어서 공업도시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었습니다.



울산이 공업화하자 시민의 생활도 비약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즉 1962년 울산시민의 1인당 생산액은 69달러에 불과했는데 1967년에는 무려 6배인 355달러로 늘었으며 1968년에는 542달러의 1인당 시민생산소득을 자랑하게 됐습니다.



또한, 울산시의 세정규모도 제1차 5개년 계획 전과 비교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있습니다. 즉 1967년의 세정규모는 1966년보다 30배가 넘는 5억 5천만 원으로 늘었고 1968년에는 그의 두 배인 10억 원을 돌파할 것입니다.



건설과 생산에 여념이 없는 울산, 이곳 건설의 역군은 하루 일이 지나면 또 직장을 방위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특히 산업도시로서 막대한 자금을 들인 산업시설을 스스로 지켜나가자면 그 어느 곳보다도 긴장되고 현역군인 못지않은 전투력을 길러야 합니다.



하루에 직장생활을 떠나면 내일의 일을 위해서 오늘의 남은 시간을 충분히 즐기고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당 시는 시민의 휴양과 관광객의 유치를 위해서 관광개발도 일찍 착수했습니다. 여기는 울산시에서 21킬로미터 떨어진 동해안의 명승지인 방어진으로 해금강을 연상케 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는 일산해수욕장이 있는데 동남해안 굴지의 피서지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불과 6년 만에 이룩한 울산의 기적, 그러나 울산의 발전은 아직도 시작인 양 새로운 일을 여념 없이 계획하고 착수하고 건설 중에 있습니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여기 울산은 이미 앞장을 선 것입니다. 우렁찬 건설의 수레 소리가 동해를 진동하는 가운데 번영만이 있는 조국건설에 앞장을 선 것입니다. 건설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습니다. 5천 년 역사 위에 찬란히 꽃 피울 조국건설에 누구나 앞장을 섭시다. 피와 땀을 흘립시다. 몸과 마음을 불태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