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한반도는 다시 봐도 하나일 뿐인데 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휴전선이 오랜동안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다.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언제든지 뚫릴 수 있는 이 철책의 장벽.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이틀 후 8월 8일에 나가사키, 이 두 지역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 앞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가져왔고 우리 겨레는 해방을 맞이했다. 겨레의 함성은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했다. 원폭 투하 이후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에도 계속 남진해 8월 말까지 북한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말았다. 북위 38도선 이남에 미국 군대가 진주한 것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보다 한 달이 늦은 9월 9일의 일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남과 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던 것이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패전한 일본군은 도망치듯 떠나갔다. 전후 처리를 위해 편의상 그어놓은 북위 38도선이 그만 남북분단의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해외에 망명했던 동포들은 귀국선을 타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승만 박사도 귀국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도 돌아왔다. 해방 이듬해 3.1절 행사를 민주 진영과 공산 계열은 파고다 공원과 남산에서 별도로 가지는 등 좌우 분열의 양상이 시작됐다.

한편, 평양에서는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우익 진영을 제거하고 소련군 소령이던 33세의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이 북한의 공산기지화에 착수해 KGB, 즉 비밀경찰에 테러수법 등을 동원, 김일성의 권력 장악 기반을 마련했다. 서울에서는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 노동당 세력이 공공연히 남한의 공산화를 획책하며 온갖 폭력수단을 다 동원하여 극심한 사회 혼란을 일으켰다. 노동자와 공무원의 조직까지 동원해 총파업에 돌입하고 청년학생층의 시위와 난동을 조종했다.

유엔 총회는 유엔 감시 아래 한국 통일을 위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1948년 1월 유엔 임시 한국 위원단을 파견했다. 남한에서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북한 측은 이 위원단의 입국조차도 거절하여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때 김구 선생은 평양에 가서 남북 협상을 폈지만, 북한의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돌아왔다. 유엔은 결국 자유 총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38선 이남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같은 해 5월 10일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치렀다. 총선거는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라 3분의 1인 100석의 의석을 북한 지역을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8월 15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의 독립과 정부수립을 온 세계에 선포했다.

정부수립의 축제 속에 공산분자들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일으켜 양민학살을 자행했다. 북한에서도 선거라는 것이 실시됐다. 그러나 인민의 대표를 뽑는다는 북한의 선거는 찬성이냐 반대냐를 묻는 흑백선거였다. 이것이 공산정권의 선거 제도이다. 김일성은 정권을 수립하기도 전인 48년 2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 인민군부터 창설하여 전술 전력을 강화해 왔다. 그리고 소련은 같은 해 12월 북한으로부터 소련군을 일방적으로 철수해갔다. 그러면서 남한의 미군도 물러가라고 요구해 한반도에서의 힘의 공백을 노출시켰다. 여기는 1949년 3월의 모스크바.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겉으로는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맺고 비밀리에 무기반입을 내용으로 하는 군사 비밀 협정을 맺었다. 242대의 T-34형 소련제 전차가 속속 북한으로 반입됐다. 또한, 중공을 방문한 김일성은 어떠한 침략도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내용의 방위 협정을 맺어놓았다. 이 무렵 만주 땅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중공군 소속 팔로군 한인계 병력이 남침에 앞장서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왔다. 북한 공산군은 이동 연예대를 편성해 농촌 여러 지역을 돌며 남녀 청소년들의 군 입대를 선동했다. 그동안 지원형식으로 모병하던 것을 강제 모병으로 바꾸고 18세부터 30세까지의 모든 북한 청소년을 인민군대로 끌고 간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다. 수풍댐과 같은 산업시설 공사장에 북한 주민들이 강제 동원돼서 혹사당하기도 했다. 사냥개를 몰고 강제노동을 지도하는 김책, 그는 6.25때 남침에 앞장섰던 전선 사령관이었다. 그들은 또 무기를 포함한 각종 군수품 생산에 열을 올렸다. 전후 일본이 남기고 간 한반도의 공업시설 중 9할 이상이 38선 이북 북한 땅에 편중되어 있었고 이러한 공업시설들을 모두 군수공장으로 바꿔서 밤낮없이 살인 무기와 장비들을 생산해냈던 것이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군사훈련은 완전 전투태세로 들어갔다. 김일성은 그 자신도 군복을 입고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서 침략준비를 지휘했다. 김일성은 이때 1950년은 조국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며 승리를 향해 전진하는 전체인민에게 영광이 있을 것이라고 신년사에서 말했다. 훗날 소련의 최고 통치자가 됐던 흐루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1949년 말 김일성은 그의 대표단을 인솔하고 스탈린과 회담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때 김일성은 남한에 대해 무력도발을 원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한에 한두 번 자극을 주기만 하면 남한에서 내란이 일어나 인민의 힘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해올 가능성에 대해 염려했지만, 김일성은 전쟁이 전격적으로 수행된다면 단시일 내에 승리로 끝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의 개입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졌다. 흐루쇼프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말하면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완전한 성공을 기원했고 그들의 투쟁이 승리할 날을 고대하며 건배했다고 기록했다. 결국, 한국 전쟁은 북한이 주도하고 소련과 중공이 개입한 3자 공모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그 당시 남한의 경제사정은 공업지대인 북한과의 유통이 막혀서 거의 마비상태였고 지리적으로 농업생산지대인 데도 비료공장 하나 없었다. 그나마 48년 5월 4일에는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완전히 끊음으로써 산업시설의 가동이 마비됐다.

그 당시 국군은 구식무기로 경무장한 7개 보병사단을 주축으로 38선 경비와 후방치안을 맡고 있었다. 달구지를 수송수단으로 이용했던 당시의 한국군, 중화기는 몇 문의 박격포뿐이었다. 공군력도 L-4와 같은 연습용 경비행기 22대가 고작이었다. 서해안을 낀 38선 인근에 옹진반도에는 공산군의 도발이 잦아 주민들 스스로가 죽창을 들고 향토방위에 나섰으며 이곳을 지키던 한국군 17연대는 인민군 귀순병들을 통해서 38선 북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자위책 강구에 분주했다. 1949년 6월에는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철수했다. 6.25 1년 전의 일이었다. 해가 바뀐 1950년 1월 미국 트루먼 행정부의 에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발표했다. 이 지도에서 보듯이 극동 방위선은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을 그어놓고 한국을 그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한편, 북한에서는 야암을 틈타 38선 쪽으로 부대이동을 단행했다. 주민들이 후방으로 소개된 가운데 농촌도 완전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1개 군단으로 편성, 공격 편제로 바꾼 북한 공산군의 6월 18일 자로 총사령관 김일성의 정찰명령 1호가 떨어졌다. 6.25당시 귀순한 인민군 총좌 이학구의 증언과 압수한 원문 명령서에 따르면은 한국군의 배치상황을 소상히 밝히고 공격준비를 완료하라는 것이었다. 이때 그들은 1949년도 판 5만분의 1지도를 사용했다. 6.25 개전 직전에 북한 공산군 배치현황을 보면 배후에 전차연대와 사단, 38선에 14돌격 연대와 7개의 돌격사단을 배치하고 있다. 이로써 북괴의 남침준비 태세는 완료됐다.

1950년 5월, 서울의 창경원. 그 무렵 남한에서는 공산분자와 공비들의 준동이 멈춰진 가운데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당시 평양 측은 조만식 선생과 간첩 김삼용, 이주하의 교환을 제의, 위장 평화 공세를 취했다. 군 병력 3분의 2는 휴가 중이었고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었다.

6월 24일 토요일 밤의 서울은 평온하기만 했다. 38선상의 6월 25일 새벽, 정확히 4시 20분.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운 북한 공산군은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6월 25일자 서울의 신문들은 북한 괴뢰군이 돌연 남침을 기도했지만, 정예의 국군이 공격 중이며 전에도 자주 있었던 산발적인 충돌로 판단하고 민심은 지극히 평온하다고 보도했다. 갑자기 북괴의 전면남침을 당한 국군은 긴급히 대책을 마련코자 했으나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치밀한 계획아래 현대식 무장을 하고 잘 훈련받은 11만 북괴군은 거침없이 남진해왔다. 그날 세계 신문들은 북괴군의 불법 남침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뉴욕시간으로 이날 오후 3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마침 소련대표가 참석치 않아 거부권 행사 없이 북한에 대해 즉각 공격을 멈출 것과 그들의 병력을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전세는 시시각각으로 국군에게 불리했고 장비와 병력 등 모든 면에서 월등한 북괴군이 빠른 속도로 남진했다. 침략군은 마침내 임진강을 건너고 말았다. 6월 26일, 27일에 이어 28일에 이미 북괴군은 서울을 장악하고 인천, 영등포, 춘천, 강릉으로 이어지는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28일 새벽 국군은 한강대교를 포함한 두 개의 철교를 폭파하고 남쪽으로 후퇴했다. 적의 남진을 지연시킬 목적이었으나 이 바람에 피난길이 막혀버린 시민들도 많았다. 개전 사흘 후인 이날 오전 북한 공산군은 서울을 짓밟았다. 이상하게도 북괴군은 이로부터 3일간 승리에 도취되어 서울에서 질척거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군은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북괴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한강을 넘었다. 한강 방위선이 무너지면서 남하하는 피난민들의 발걸음도 바쁘기만 했다. 당시 수원역 앞을 지나 남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피난민들, 살던 집 정든 고향을 버려두고 목숨을 부지하기 피난길을 떠나야만 했던 이 참담한 비극을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6.25를 경험하지 못한 40대 이하의 연령층이 오늘날 한국 전체인구의 8할이나 된다고 한다.

최초 유엔군으로서 첫 번째 참전한 것은 스미스부대였다. 수원 남쪽 오산에 진을 친 스미스 부대가 공산군을 맞아 싸웠으나 무장과 병력 등 모든 면에서 적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돼 7월 12일 유엔기를 인수받고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대전 피난민들은 대전에서도 짐을 풀 수가 없어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옮겨야 했고 이 지역민들 역시 피난민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9일과 20일에 있었던 대전 시가전, 3,900명의 미 24사단은 이 전투에서 30%의 병력 손실을 보아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때 딘 소장이 적에게 포로가 됐다. 8월에 접어들면서 한반도 전역이 대부분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아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주축으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상황이 됐다. 더 이상 물러나려야 물러 설 수도 없는 대구지역. 대전을 거쳐 대구에까지 후퇴한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야 했고 조병옥 내무장관은 대구 사수의 결의를 다짐했다. 여기는 부산, 유엔군 병력이 속속 들어왔다. 미국, 호주, 영국, 벨기에, 캐나다 등 16개국이 참전했고 의료봉사와 물자 지원 등 다른 원조 국가를 합치면 40여 개국에 이른다. 이제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붉은 침략군에 짓밟힌 수도 서울, 이따금씩 전차가 움직일 뿐 텅 빈 광화문 네거리. 그리고 남대문과 독립문, 스탈린과 김일성을 그린 현수막이 6.25가 그들의 합작품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인민 해방 전쟁이라면서 스탈린 초상을 들고 광란함은 무슨 의미인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서울 시민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침략 전을 찬성한다고 나서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다. 폭격으로 파괴된 각종 수송수단을 강제 노동으로 수리 복구하고 공산당에 협조를 하지 않거나 미움을 산 경우에는 인민재판 등을 통해서 무자비하게 학살되곤 했다. 북괴군은 나이 어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의용군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전쟁터로 끌고 갔다. 방아쇠만 당길 줄 알도록 훈련해서 싸움터로 내몰았으니 전쟁 소모품에 지나지 않았다.

여기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의 보루 포항, 적의 8월 총공세가 가해져 단숨에 부산까지 밀어붙일 기세였다. 바로 이때 영남지방에 모인 한국의 젊은 학도들이 분연히 궐기해서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했다. 포항지구의 공방전은 자그만치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치열한 전투였다. 못다 핀 꽃송이처럼 이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학생들, 그들의 피는 산을 적시고 강을 물들였다. 조국의 엄숙한 이름으로 그대들에게 책을 던지고 총을 들게 했노라. 의당 있어야 할 군번도 주지 못한 채 젊은 그대들을 전선으로 보내놓고 수많은 어버이들은 그렇게 통곡했었노라. 결국, 북괴군은 형산강을 넘지 못하고 숱한 패잔병을 남겨놓은 채 북방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대구 북쪽의 낙동강 전선 9월 초순 북괴군의 대공세로 한 때 전선은 대구 근교 12km까지 압축돼 유엔군이 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그러나 한미 양군은 이곳에서 북괴군과 배수의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을 벌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적진지가 무너지고 투항하는 패잔병들이 늘어났다. 북괴군 포로들 중에는 국민학생 또래의 어린 병사도 많았다. 사상을 위해서 또 누구를 위해서 싸웠다기보다 어쩔 수 없이 전선으로 내몰린 처지여서 이제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으로 식욕을 되살리는 표정들이었다.

9월 15일 미명 인천 앞바다. 유엔군 함선 261척이 참가한 상륙작전이 예정대로 진척돼 최초 목표인 월미도를 공격했다. 28분 만에 월미도를 점령한 유엔군은 이날 오후 그 주력이 인천에 상륙함으로써 인천 시가를 손안에 넣게 되었다. 이때 인천 지역에는 공산군 2,000여 병력이 한사코 버텼으나, 9월 16일 새벽 인천을 둘러싸고 있는 주요지점을 국군과 유엔군이 모두 차지했다. 유엔군은 상륙 후 24시간 만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인천이 수복될 때 붉은 치하에서 숨어 살던 시민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상륙군을 환영했다. 부상한 적병도 치료해주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경인가도를 누비며 서울로 진격했다. 17일에는 김포비행장을 점령하고 19일 영등포에 돌입했다. 9월 20일 아군은 한강을 건넜다. 전황이 급전하는 사이 한미해병은 서대문의 북괴군 주 저항선을 강타하고 시가전을 벌이면서 소탕작전을 펼쳤다. 전세가 역전되자 낙동강 전선에 적 주력은 퇴로가 끊길 것이 두려워 9월 23일에 총퇴각 명령을 내렸고 서울에는 잔당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침내 27일 아침 한국 해병 용사들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28일에는 서울 수복을 자축하는 행사가 베풀어졌으니 실함된 지 98일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한 것이었다.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 혈육은 이미 생사를 달리하고 통곡 또 통곡뿐이었다. 긴 역사 속에 조상의 유산을 간직해온 민족의 수도 서울은 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과연 이 전쟁은 누가 무엇을 위해 일으킨 만행이었던가.

파죽지세로 38선에 진출한 국군은 10월 1일 강릉에서 가장 먼저 38선을 돌파 북진을 개시했다. 아군이 가는 곳마다 북한 주민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마주잡은 손과 손에는 동포의 뜨거운 피가 흘렀고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치솟았다. 38선을 돌파한지 불과 열흘 만에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원산에 입성했다. 그러나 자유를 찾은 대가는 엄청나게 컸고, 자유를 누린 기간은 너무나 순간적이었다. 시체, 시체더미들 대체 누가 누구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단 말이던가.

10월 20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 그리고 30일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평양에 도착한 가운데 시민환영대회가 평양시청 앞에서 펼쳐졌다. 이제는 남북의 동포가 다함께 자유롭게 살 수 있겠거니 여기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평양북방의 숙천과 순천일대에 낙하산 투하작전을 전개한 유엔군은 적의 퇴로를 위협했다. ?기는 공산군은 저항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보였다. 아군은 북으로 진격하면서 북괴군과 양민의 귀순을 종용하는 선무작전에도 최선을 다했다. 국군 정훈 부대들은 적이 잠복한 가까운 거리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귀순종용 방송을 실시했다. 손을 들고 귀순하는 양민과 병사들이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었다.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은 발길도 사뭇 가벼웠다. 박천을 거쳐 일로 압록강으로 향했다. 10월 말경에 이르러 한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한만국경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10월 26일 한만국경에 있는 초산에 도착한 국군선봉대. 이제야 말로 국토의 통일이 눈앞에 온 것으로 느껴졌다. 눈앞에 전개된 저 강이 바로 압록강이다.

그러나 이때 체포되어 오는 중공군에게서 이상한 첩보를 접할 수 있었다. 당시 중공의 수도 북경에 있던 조선관,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 김일성이 허정숙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북경에 보내 중공군의 참전을 요청했다. 수십만의 중공군이 한만국경을 넘어들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이때 소련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3차 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으나 모택동은 정규군 대신 인민의용군 형식으로 참전하면 걱정이 없다면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강을 건너온 중공군은 30개 사단 30만 병력에 이르렀고 북한 인민군은 이들을 얼싸 안으면서 환영해 마지않았다. 중공군이 합류하면서 북괴군은 활기를 되찾아 전투는 새로운 양상으로 확대돼 나갔다. 유엔군은 당황했다. 북괴군은 연약한 부녀자까지 동원하여 일선으로 밥을 나르고 술병을 들고 오도록 했다. 겨울 산악전투에 익숙한 중공군, 그들은 때를 만난 듯 날뛰었고 11월 24일 유엔군은 국경전선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중공군에 불의의 기습을 받아 눈 속의 작전이 벌어진 것이다. 후퇴하는 유엔군이 교량을 폭파하면 중공군은 수많은 인력으로 즉각 복구하는 것이었다. 12월 초의 흥남부두, 10만을 넘는 전투요원과 15만 피난민이 남으로 가는 배를 타야할 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이 전개됐다. 유엔군의 엄호 속에 적이 뒤쫓아 오기 전에 펼쳐야만 했던 작전이었다. 그 혼란 속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모인 가족들만이라도 배를 타야만 했다. 배를 타느냐 못타느냐 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곧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뛰어가면서까지 배에 오르려고 애썼다. LSD 한척에 12,000명이나 타기도 했던 그때 아직도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부두의 피난민들은 배를 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삽시간에 울음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배를 못 탄 피난민들은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평양, 끊어진 대동강 철교 그 미끄럽고 아슬아슬한 철주를 타고 남행길을 재촉하던 평안도 사람들, 평양은 다시 공산군의 군화에 짓밟히고 말았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비워주고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한 많은 1월 4일에 1.4후퇴. 당시 120만 서울 시민과 북한에서 남하한 50만 동포가 함께 피난길을 떠났다. 남부여대, 아이들을 안고 업고 짐을 지고 이고 서울을 떠나야만 했던 피난민들 어째서 이런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것인지. 몹시도 추웠던 그해 겨울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떠나야 했고 지금의 마포대교 쪽인 마포강에도 피난민의 대열이 넘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영등포역, 객차든 화차든 닥치는 대로 타고 남쪽으로 가고 볼일이었다. 기차바퀴 그 위면 어디든지 올라탔다. 화통에서 뿜어내는 증기가 얼굴에 닿아 얼고 부르트고 찢어지기도 했다. 얼어붙는 자신의 얼굴을 아기의 볼에 포개는 한 엄마는 이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피난길에서 부모마저 잃은 저 아이는 대체 누구를 찾아가야 할 것인지. 떨어질세라 아이를 기관차에 잡아매는 어버이. 이윽고 기차가 떠난다. 일정한 시간도 없이 기관차나 차량이 마련되는 대로 떠나는 피난 열차였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큰 화를 만나야 했던지. 텅 빈 주인 없는 서울,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비극의 행진은 남으로 갈수록 도도한 물결처럼 불어만 갔다. 수백만 명에 이른 이 대열은 자유를 찾아 나선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8.15 해방이후 소용돌이치는 내외정세 속에서 방만한 자유에 흠뻑 젖어 정신 차리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다가 온 겨레가 함께 격어야만 했던 비극이 아니었는지. 40년 세월이 지난 오늘 또다시 이런 비극이 되풀이 하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 아닌가. 수레를 끌고 수레바퀴를 지고 가는 피난민들, 오늘날에는 피난자체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6.25 그 비극의 의미를 곱씹어봐야 할 오늘이다. 여기는 그 당시의 부산, 수백만 피난민들이 집결한 이 항구도시는 큰 혼잡을 이루었다. 전쟁고아와 거지와 난민들 그 참담한 고통 중에서도 먹어야했고 잠을 자야 했다. 먹는다는 것, 입는다는 것, 잠을 잔다는 것, 최소한의 생존의 조건을 갖추기도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와도 고향으로 돌아 갈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채 피난생활이 계속됐다. 전쟁 중에 피난학교도 문을 열었다. 중학생과 국민학교 어린이들이 뙤약볕 아래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피난지에서 대학들도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부산에 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임시 캠퍼스, 김활란 박사가 보인다. 여기는 대구에 가 있던 고려대학교, 부산에서의 연세대학교, 이러한 배움의 집념은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되었다.

후퇴한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정비해 다시 반격을 개시했다. 한강에서 접전을 벌인 끝에 3월 14일 서울을 재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국군은 중앙청에 다시 태극기를 게양했다. 4월 30일에는 또 다시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하였다. 1951년 7월 10일 개성, 전세가 불리하게 된 북한과 중공군은 이보다 앞서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통해 휴전을 제안케 했고 유엔군이 여기에 응함으로써 이날 개성에서 첫 휴전 회담이 열리게 됐다. 휴전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에도 쌍방의 공방전은 치열하기만 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는 가운데 휴전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기도 했다. 한차례 출격에서 무려 60만 톤의 폭탄이 떨어지고 22만발의 포탄 세례가 퍼부어진 백마고지 전투의 경우는 전후 20여 차례에 걸쳐 주인을 달리했다는 사실로서도 당시의 전투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해를 두 번씩이나 넘긴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38선 근처를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휴전협정이 조인된 가운데 전쟁은 정전이란 이름으로 결말을 보게 됐다. 동서 640리 155마일에 걸친 휴전선이 그어지고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지금까지도 이곳의 상황은 변함이 없다. 북한 공산군에 의해 저질러진 6.25전쟁, 한때 한반도 전역에 20분의 19까지를 침공해왔으나 곧 유엔군의 반격으로 압록강 까지 북진, 통일이 눈앞에 온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겪은 후 휴전선이 그어지기까지 3년 1개월 전쟁은 참으로 많은 것을 앗아갔다. 6.25 동란의 결산은 과연 무엇인가. 전쟁은 한없는 슬픔만을 깊은 상처로 남겨놓았다. 피난민 240만 명, 월남가족 514만 명, 전쟁미망인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이 미망인은 지금 몇 살이나 되었을까. 전쟁고아는 10만 명, 이들이 살았으면 50대는 되었으리라. 남북을 합친 군인 300만 명이 전사했거나 부상당했다. 전 국민은 거지가 된 가운데 민간인 사망 37만 명에 23만 명이 부상당하고 78만 7천명이 납북되거나 행방불명 됐다. 전쟁의 포화는 멈추었으나 전쟁 그 자체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정전이란 이름으로 그저 쉬고 있을 뿐이다. 만약에 다시 전쟁이 일어난다면 재래식 전쟁이든 핵전쟁이든 또한, 승자든 패자든 전면전 상황 아래서는 국가 전체의 생존 자체가 붕괴될 뿐이다. 현대의 거대 도시화와 고층화, 산업시설의 집단화로 인해 전후복구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생존의 장 자체가 파괴되고 말 것이다. 6.25를 잊으면 역사를 잃는 것이다. 역사를 잃는다는 것은 진리를 잃는 것이요 교훈을 잃는 것이다. 그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6.25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