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내한한 미국 뉴저지 주지사 로버트 B. 마이너씨, 그리고 동주의 방위군 보급부관 제임스 F.켄트웰 소장이 데커 유엔군 총사령관 자렐 주한 미해군사령관과 함께 경무대 관저로 이 대통령을 예방했습니다. 또한 주일 미해군사령관 프레드릭 S.위딩턴 소장과 동 부인은 5월 7일 주한 미대사관 참사관 웨일씨 주한 미해군사령관 자렐 소장과 함께 김 국방부장관의 안내로 경무대관저로 이 대통령을 예방했습니다.

역사적인 제 4대 민의원 개원식이 6월 7일 드디어 개막됐습니다. ?58초부터 1분28초 이와같은 이의장의 개회사가 끝난 다음 이 대통령 께서는 약 30분 동안에 걸쳐서 초당적 분업을 기대하는 동시에 자유와 봉화의 길로 매진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의 치사를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4대 민의원 ? 모든 귀빈 여러분 오늘 이 집회는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큰기회이며 또 엄숙한 자리입니다. 제 4대 민의원은...." 이리하여 모든 국민이 기대하는 가운데 10만 선량의 선서문 낭독이 엄숙히 거행됐고 역사적인 제 4대 민의원의 막은 올랐습니다.

조국의 방패로 사라진 15만 5천 1백 71주의 호국의 영령을 모신 동작동 국군묘지에서 제3회 현충일 추도식이 6월 6일 이 대통령 내외분이 임석하신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습니다. 이날 대통령께서는 꽃다발을 재단에 올리시고 온 겨레와 함께 경건한 묵념을 하시었습니다. 이어서 대통령 께서는 유가족을 위로 격려 하시었으며 구슬픈 진혼곡과 함께 유가족을 위시한 각계각층의 참례분향이 계속 됐습니다. 또한 대통령 내외분께서는 추도식을 마치신다음 유가족 대표 180여명을 Err_Code(3분28초)로 초대하시어 다과회를 베푸는 한편 일일이 악수를 교환하시면서 그들을 성심껏 위로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부인께서는 유가족 전원에 일일이 과자를 나누어 주시고 아들을 잃은 어머니와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의 슬퍼하는 마음을 위로 하시었습니다. 한편 서울 중앙 방송국 남산 연주소에서는 이들 유가족을 위로하는 국악 연주등의 다채로운 프로가 전개되서 유가족의 마음을 위안해 주었습니다.

제 3회 아세아 경기대회에서 우리민족의 영예와 체육 한국의 전통을 과시한 우리선수단이 온겨례의 환호를 받으면서 귀국했습니다. 이날 선수의 공로를 치하하는 이의장의 환영사와 더불어 공항은 열광적인 시민의 환송으로 뒤끓었습니다. 선수일동은 곧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예방 귀국 인사를 드리고 이상백 선수단장은 국기를 반납했습니다. 기쁨에 찬 대통령 께서는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시고 그들이 탄 상품을 보신다음 잘싸워 이겨서 돌아오니 고마운 일이며 더욱 분발하라는 요지의 간곡하신 환영의 말씀을 하시었습니다. 그리고 7일에는 선수단 시민 환영회가 수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습니다. 일본 하늘에 뜻깊은 우리 태극기를 드높이 휘날린 미와 힘의 사도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전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불란서 제 4공화국은 심각한 정치 파동속에 그 뒤숭숭한 사태는 바야흐로 절정에 나고 있습니다. 이곳 파리의 시가지는 샬 드골 장군을 반대하여 궐기한 12만 군중의 데모의 물결로 뒤끓고 있습니다. 프린낭 수상은 국내 전쟁이 발발할 위험성을 재고할 자신을 전혀 잃게 됐으며 그의 사태로 말미암아 드골 장군은 이와 같은 불란서의 시련속에 일층더 중대성을 띄운 인물로 클로즈업 됐던 것입니다. 네시간동안의 시위 운동에서 군중들의 시선을 집중케 한것은 망데스 전 프랑스 수상을 위시해서 자유 및 좌익계의 지도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사회당및 극좌파에서는 드골의 집권을 반대하고 일어섰으나 한편 군대는 불란서 공산당의 세력이 그들 정부에 침입되는것을 두려워해서 드골을 지지하고 나서게 됐습니다. 전 시민의 관심은 바로 대통령 공격에 집중되고 많은 신문기자들이 농성한 가운데 포트이 대통령은 드골로 하여금 집권케 하므로서 불란서가 당면하고 있는 일대 위기의 타개책을 토의 하기 위해서 전례없는 전국 정치 지도자들의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한편 드골 지지자들의 자동차 시위 행렬은 파리의 시가지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드골은 벌써 정권을 인수할 용의를 표명한 바 있으며 가능하면 일정한 기간동안 전권을 장악해서 개헌 소동을 일소함으로써 국민의 신임을 획득하겠다고 그의 소신을 피력한바 있습니다. 한편 파리와 알제리아에서는 도처의 선동과 시위가 드높아 갔으며 그 위협에 국민의회는 마지못해 항복을 하게 됐습니다. 드디어 드골은 다시 불란서 수상에 자리에 오르게 됐으며 여기까지에는 자신의 진퇴문제를 내걸고 드골을 지지해준 포트이 대통령의 공이 컸습니다. 바스티유 감옥이 파괴된 이래 파란곡절 많은 169년동안에 불란서는 두황제와 세군주와 한독제자 그리고 네번의 공화정치를 겪어왔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변화를 예측할수 있으며 일대 전환점을 겪고난 불란서의 정계는 아직도 불안한 분위기에 쌓여 위기는 아직도 가시지는 않고 있습니다.

미해군의 이 최신식 수륙양용탱크는 적당한 별명을 갖지 못해서 그저 LVTUX2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이 상륙용 주정은 중량이 20만 6천 파운드나 되며 십만파운드 이상을 운반할수 있는것으로 바다에서 육지로 무거운 야전용 장비를 운반하며 어떠한 해안이든지 기어오를수 있는것입니다. 이 탱크는 무거운 바퀴를 굴리는 프로펠러의 어마어마한 힘으로 어떠한 암초나 얕은 해변도 거침없이 올라갈수가 있습니다. 150만 달러짜리 이 상륙용 주정은 시애틀 근해에서 행해진 이번 시험에서 기대하던바 그대로 일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곳 인디애나 폴리스에는 15만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미국 자동차 경기계의 연중 최대 행사인 금년도 500마일 스피드웨이 경기가 열렸습니다. 2마일 반 지점 활주로에서 일대 사고가 발생해서 금년들어 42년에 걸친 전통에 빛나는 인디애나 자동차 경기의 역사에 불상사를 남기게 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서 선두를 달리던 차들이 인도차를 앞질러 일대 혼란을 일으켰으며 출발의 신호기가 떨어지자 33대의 차가 한꺼번에 내달아 출발한지 1분도 못되어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열다섯번째 차가 동북코너에서 시속 175마일을 달리다가 폭발된것입니다. 1930년의 경기에서 페트 오코너가 죽은이후 가장 큰 참사였습니다. 그러나 경기는 그대로 계속되서 29초동안을 천천히 달리다가 코스에는 다시 치열한 경주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평균속도 133.791이라는 기록으로 지미 브라이언이 드디어 우승을 차지했으며 전국 자동차 경주에 연3회 선수권자가 되어 우승컵과 더불어 30만 달러의 상금을 획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