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뉴스문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대한뉴스의 산실은 국립문화제작소. 대한뉴스가 1984년 8월로서 1500호 40년의 연륜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대한뉴스 카메라에 담겨진 우리생활 40년의 변천사 일부를 당시의 화면들로 구성해 보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광복의 새 역사를 시작한 그날 그 감격 해외 망령 했던 민족 지도자들의 귀환을 초초의 대한뉴스인 조선시보가 수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해방 전 조국에는 38선이 그어지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북한에 진주했습니다. 그 무렵의 서울거리와 농촌의 풍경 1946년과 47년 우리의 장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성과 없이 결렬 되었습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지역에서만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했습니다. 이때부터 대한뉴스는 대한 전진보라는 제명으로 매달 한편씩 제작 상영했습니다. 신생 대한민국의 국군은 병력과 장비 등 모든 면에서 보잘 것 없었지만 내 조국을 지키겠다는 긍지만은 대단했습니다. 38선을 지키는 옹진반도의 죽창부대 총 대신 죽창으로 국토를 지켰습니다. 정부수립 2년이 채 못된 1950년 6월 25일 공산북한괴뢰는 남침을 해 왔습니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남침이었던 까닭에 북한 괴뢰군은 침략 사흘 후에 서울을 유린했습니다. 낙동강 지역까지 후퇴했던 아군은 9월 15일 마침내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했습니다. 9.18서울 수복으로 중앙청에 태극기를 꽂고 10월에는 평양까지 진격 우리 정부가 북녘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눈보라가 ~)내친김에 압록강까지 북진한 국군은 그러나 한 많은 흥남철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다시 피난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괴뢰의 남침으로 폐허가 된 서울은 유령의 도시처럼 암울했습니다. 1953년 여름 당시 대통령 내외분의 구호물자 전달 장면입니다. 전쟁으로 중단되었던 대한 전쟁보 대신 1953년 초에는 마침내 대한뉴스라는 제명으로 매달 한편씩 극장을 통해 상영했습니다. 폐허가 되어버린 경복궁의 잡초를 뽑아 청소하던 남녀학생들 지금은 50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대한뉴스는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 휴전협정 조인소식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송환된 반공포로들 중 대전전투에서 실종되었던 빈 소장의 모습도 보입니다. 이른바 육체파 미국배우 마릴린 먼로양이 주한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대한뉴스는 1956년 겨울에 서울시민 빙상대회를 수록하고 있는데 넥타이에 중절모를 쓴 신사차림의 선수까지 보입니다. 시대의 변천상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자전거 하이킹 사실 이 당시에는 하이킹이라는 말과 노래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50년대 후반 서울의 교통 인구 170여만의 서울주요간선도로에는 전차길이 있었고 노량진에서 종로를 거쳐 청량리까지 호남동에서 을지로 4다를 거치는 길 서대문 영천에서 서울역으로 가는 전차길이 60년대 중반까지 있었습니다. 전후의 폐허를 딛고 비록 구렁텅이 철판을 오려 입혔을망정 우리 손으로 버스도 제작해서 타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6.25직후부터 등장했던 관광버스 당시에서는 명물이었고 유람객을 많이 태워 날랐습니다. 국산 시발 세단이 등장한 것이 57년 무렵이었습니다. 자동가마니틀을 고안해낸 사람이 제 1회 발명상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유전공학 등 첨단과학이 각광을 받는 오늘의 과학기술수준과 비교해보면 좋은 대조가 됩니다. 나일론 옷이 한창 유행하던 때 우리도 처음으로 나일론 옷감을 짜내기 시작했습니다. 필터가 달린 담배 아리랑이 처음으로 선을 보였습니다. 이때가 1958년 대한뉴스는 월 한편 제작에서 주간 단위 뉴스영화로 발전했고 필름도 35미리 표준형으로 바뀌어 매주 120번씩 배포했습니다. 같은 무렵 국내에서 최초로 라디오를 조립 생산했고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를 누렸습니다. 50년대 이후 처음으로 동전이 나왔습니다. 50년대 후반 종로 야시장 거리입니다. 1957년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미녀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어서 당시의 미인과 현대의 미인을 비교해 볼 때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됩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신의 창조물 중 걸작으로 예로부터 찬미의 대상이 되어 왔고 유행 또한 끊임없이 변천해 왔습니다. 그 당시의 여름 한강과 강나루 정릉 계곡을 찾은 서울시민들의 더위를 이기는 방법입니다. 요즘과 같은 장사씨름대회가 오르기 전인 이때만 해도 씨름은 지방 민속의 테두리 안에 있었습니다. 1959년 추석날 남쪽에 상륙한 태풍 사라는 불과 이틀 동안의 살인적인 폭우와 폭으로 해안지방은 물론 내륙과 도서지방까지 물바다로 만들었고 엄청난 사상자와 재산피해를 냈습니다. 태풍과 함께 50년대가 가고 196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60년대는 새로운 의미를 갖는 시기였습니다. 4.19이후 과도정부시절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1960년의 가을 평화로운 시골 장날입니다. 1961년이 마지막 가던 12월 31일 서울 남산에 KBS 방송국이 개국했습니다. 한영숙씨의 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가 한창 유행하던 때입니다. (노란 샤스 입은 말없는 그 사람이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 5.16이후 재건 국민운동이 크게 번지는 가운데 물자 절약과 관련해서 대한 뉴스는 짧은 치마입기 계몽을 하기도 했습니다. 긴치마의 불편함과 짧은 치마의 편리함을 영화적으로 표현한 캠페인 이었습니다. 전문인을 포함한 직장인 사이에서도 재건복이라는 이름의 간소복 입기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씨가 스페인에서 잠시 귀국해 서울 국제음악회를 연 일도 있었습니다. 제 9회 아시아 영화제를 서울 시민회관에서 개최한 것이 1962년 5월의 일입니다. 63년 4월 광나루 맞은편에 워커힐을 개관하고 관광한국의 꿈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루이 암스트롱 초청공연 1964년의 도쿄올림픽 이 대회에 우리나라는 16개 종목 212명의 선수단을 파견해 레슬링과 권투에서 각각 은메달을 한 개씩 따내고 유도에서 동메달 한 개를 보탰습니다. 도쿄올림픽은 남쪽의 아버지 신문준 씨와 북쪽의 딸 신금단 육상선수가 14년 만에 극적으로 만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1966년 6월 22일의 서울의 장충체육관 주니어 미들급의 김기수 선수는 이탈리아 벤베누티선수를 15회 판정으로 물리치고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대규모의 아파트단지로서는 처음으로 마포아파트가 60년대에 건설되었습니다. 제2한강교가 개통된 이후 지금까지 한강다리는 열여섯 개가 개통 또는 시공 중에 있으며 제2한강교도 확장되었습니다. 60년대 중반 월남에 우리 국군을 파견하게 되면서 우리나라는 도움 받던 나라에서 도와주는 나라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월남에서 대한뉴스 박옥봉 특파원의 보도 대한뉴스는 특파원을 주재시켜서 월남전투를 취재해 수난소식을 보도했습니다. 68년 1.21 북한괴뢰 무장공비 침투사건 31인조 공비 중 한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해 4월 250만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고 그해 12월 울진삼척지구로 100여명의 공비가 또 침투했으나 공산당이 싫다며 숨져간 이승복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들의 반공정신과 향토예비군의 활약으로 공비군은 소탕되었습니다. 67년 판문점을 통해 귀순을 위장 침투해온 이수근은 간첩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69년 1월 서울을 탈출했으나 사이공에서 체포 압송되어 왔습니다. 69년 2월 어린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해방시킨 첫 중학 무시험 입학 추첨 이때의 어린이들은 지금 20대 후반의 젊은이로 성장해 있습니다. 1970년대 접어들면서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습니다. 서울 인천 간, 서울 수원 간 고속도로 개통에 이어 70년 7월 서울 부산 간 전 구간이 개통됨으로서 하루 생활권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71년 크리스마스 서울 충무로에 있는 23층의 대연각 호텔에서 일어난 불은 164명의 사망자를 낸 엄청난 화재였습니다. 대한 뉴스는 70년 초에 천연색으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뉴스는 대한적십자사 대표단을 수행해 평양에 들어가 남북대화의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북한괴뢰는 휴전선 땅 밑으로 남침용 땅굴을 파 내려 왔습니다. 근면 자조 자립의 새마을 운동 이 운동은 우리 국민의 의식을 개혁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73년부터 대한뉴스는 본격적인 천연색 뉴스영화로 제작했습니다. 서울시민의 식수문제를 해결해 준 팔당댐 준공 일억불 수출을 당성한 지 10여년만에 100억불 고지를 점령한 1970년대는 우리 경제의 도약을 실감케 해준 시기였습니다. 76년 제 21회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페더급에 출전한 양정모 선수 첫 금메달을 따 냄으로서 한국 스포츠의 신기원을 이뤄 냈습니다. 격동의 70년대가 저물고 대망의 8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제 5공화국의 출범으로 개혁과 개방의 새 시대를 맞아 중고등학생 학생들의 복장이 자율에 맡겨졌습니다. 이 자율과 개방은 모든 계층으로 확대되어 국민의식과 행동이 밝고 창의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광복 후 줄곧 계속되어 오던 통행금지가 해제되어 우리 생활에 불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사상 처음 한자리수로 물가가 정착되어 국민생활은 크게 안정되었습니다. 이 밖에 무질서 심리와 부패 심리를 추방해 나가는 가운데 이 땅에 바르고 뜨뜻한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모두가 힘쓰고 있습니다. 1974년에 서울 지하철 종로선이 개통된 이래 지하철 10년 만에 2호 순환선이 개통됨으로서 본격적인 지하철 시대를 맞았습니다. 대한뉴스 1500호를 거치면서 획기적인 소식에 하나로서 88서울 올림픽 유치를 들수 잇습니다. 올림픽 유치에 있어서 국립영화제작소가 제작한 단편 기록 영화가 바덴바덴 총회에 참석한 IOC의원들을 감동시켰던 것도 새롭습니다. 번영과 하합의 도로로 상징되는 대구 광주 간 88올림픽 고속도로가 금년에 개통되었습니다. 겨레의 염원인 선진 조국 통일조국의 품안에서 우리 모두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릴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대한뉴스는 맡은바 임무를 다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