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도 계엄사가 발표한 내용과 그 당시 수집한 자료를 기초를 해서 광주 사태에 대한 배경과 동기부터서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6 사태 이후에 80년 당시 정부는 사면복권을 약속을 하고 계엄일정을 단축하는 등 민주화일정을 추진하고 있었으나 일부 정치세력의 성급한 주장과 학생사주로 인해서 학원소요가 격하되어 전국적으로 치안유지가 곤란한 가운데서 경제적으로도 노사분규가 가열되어 많은 업체가 농성내지는 파업에 가담을 하였고 특히 사북사태 등으로 인해서 생산과 수출이 급격히 둔화가 되어 정치, 경제, 사회 혼란이 가중이 되고 물가가 치솟아 민생안정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호시탐탐 남침기회 포착에 혈안이 되고 있는 북괴는 혼란한 국내정세에 고무가 되어서 대규모 기갑부대를 전방으로 추진, 배치하였고 특히 북괴는 전쟁시에는 서부전선 사령부, 중부전선사령부, 동부전선사령부 이런 세 가지 전선 사령부가 걔네들이 편자해 있습니다. 이때 오진호 인민무력부장은 전쟁지도부에 나와 있었고 인민군 총참모장 오궁열은 최전방인 개성지구 전방사령부에 위치하는 등 군사적 긴장상태를 고조시키고 있어 국내적으로 국가안보와 국민생존권이 크게 위협되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란 사태에 아프간사태 중동 분규로 인해서 국제정세가 급변하고 북괴가 곧 남침을 자행할 것이라는 첩보로 인해서 건국 이래 최대의 난국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당시 위기의식에 사로잡힌 대다수 국민들이 사회 안녕질서회복을 갈망하는 사항에 이르러 정부에서는 부득이 국가적 비상난국을 슬기롭게 대처하기 위해서 5.17 비상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조치로 서울 등 대부분의 지역이 일단 평온을 되찾게 됐습니다.

그러나 광주에서만은 전국 계엄령이 선포된 다음날인 80년 5월 18일 오전 09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세력의 배후조정을 받은 전남대학생 약 200명이 사전에 계획된 시위를 강행하기 위해 가방 속에 돌을 넣고 도서관 출입을 요구하다가 계엄군이 이를 저지 하자 준비한 돌멩이로 일제히 투석전을 전개 파상적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질서유지를 위해 출동한 계엄군이 학생으로부터 돌을 맞는 사태가 발생하고 그 후 학생들은 시내로 잠입해서 가두시위를 자행했습니다. 이에 경찰력으로 질서회복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시위 군중들에 의해 경찰 27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경찰력만으로는 더 이상 사태를 수습할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게 돼 부득이 군이 질서유지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지과정에서 일어난 흥분한 시위군중과 계엄군과의 충돌과 오해로 감정이 폭발됐고 불순분자들에 의해 조작된 기상천외한 온갖 유언비어는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해 군과 시민을 이간시키고 방화, 파괴, 살상을 유도 끝내는 총기를 탈취한 무장난동으로 광주시 일원은 무법천지화 되고 모든 행정기능이 마비가 돼 드디어 무정부상태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 같이 광주사태가 확산되게 된 이면에 일부 정치세력에 의한 배후조정이 있었던 점은 이미 당시에 대법원 판결을 통해 분명히 밝혀진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