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일자별로 사태진전에 관해서 소상하게 육하원칙에 의해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5월18일 영아홉시경 전남대 앞에서 최초로 계엄군과 충돌했던 전남대생 200여명이 10시경에 광주시내 중심가로 진출을 해서 계엄철폐등의 구호를 외치며 점차 격화되었고 오후 2시경에는 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으로 대치하면서 파출소 투석, 경찰차 방화 등, 시위가 격렬해짐으로써 경찰력만으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됐습니다.

이에 계엄당국은 부득이 오후16시40분경에 광주지역 주둔병력 일부로써 폭력저항을 조기에 수습하려 하였으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투석과 폭행으로 저항했고 일부 불순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 유언비어에 흥분한 주변건물의 일부시민이 합세를 해서 군인에게 투석함으로써 쌍방간에 부상자가 발생을 하자 상호감정이 폭발을 해서 욕설과 고함으로 대결하게 됐으며 젊은 군인들이 과열한 난동의 와중에서 저지임무를 수행하게됨으로써 자연히 시위학생을 군중의 면전에서 저지,연행하지 않을 수 없었고 학생들의 저항으로 인해여 다소 과민한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 당시까지는 상호간의 부상자는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고 단 한 사람의 사망자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일 정오부터서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리러 왔다. 여학생을 발가벗겨서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냈다. 또한 계엄군이 임신부를 칼로 찔러가가지고 태아를 끄집어 내서 버렸다. 이런 터무니없는 여부가 유포가 됐는데 이는 우리내부의 분열과 혼란을 극대화 시켜 폭동으로 유도하려는 불순분자들의 계획적인 소행이였습니다. 이때 출동한 병력은 광주지역에 위치한 일부병력과 전주지역에 위치한 칠공수단 휘하에 33대대 및 35대대였으며 이 33대대의 대대장은 전주출신이고 35대대 대대장은 대구출신이였으며 광주에 투입된 대원의 40프로가 전남북 출신이였는바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봐서도 그 유언비어가 얼마나 터무니 없는 말인가를 잘 실증해주고 있습니다. 19일에는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는 시내에 더욱 퍼져 이성과 냉정을 상실한 군중심리가 광주시내를 휩쓸게 되었고 흥분한 일부군중들이 격렬한 시위를 감행하면서 화염병으로 파출소를 방화하는가 하면은 취재차량과 승용차를 방화, 파괴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최초로 계엄군의 무기가 군중에게 탈취당하는 사례가 발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수부대들이 젊은 놈은 모조리 죽인다더라, 광주시민 70퍼센트를 죽인다, 더라는 등의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악랄한 유언비어가 시시각각으로 조작되어서 유입물과 구전을 통해서 조직적으로 유포가 됐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시가지는 연기와 함성등으로 대혼란이 야기가 됐고 군중들이 각목과 쇠파이프 등을 휘두르고 경찰과 계엄군에 맞서 난동을 부림으로써 그 와중에서 최초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0일 오전에는 비가 내려 별다른 사항이 없었으나 오후에 이르러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온 흥분한 군중 일만여명이 극렬한 시위를 전개하였고, 특히 16시 30분경에는 무등산 경기장 앞 광장에서 악랄한 유언비어에 흥분한 택시운전병들이 모여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택시 40여대를 앞세워 차량시위를 감행한데 이어 저녁 18시30분에도 택시 2백여대가 동 광장에서 삼열로 전조등을 켠 채 시위를 강행하는가 하면 엠비씨 방송국을 방화하였으며 시청을 파괴하고 도청 앞에 저지 경찰관 4명을 차량으로 깔려죽이는가 하면 시내의 세개 파출소를 파괴하고 버스와 택시대열을 앞세워서 군경 저지선을 돌진, 돌파를 시도하였으며 광주시는 연기와 불꽃이 치솟는 공포의 도가니로 변하게 되었고 시위에 참가한 군중은 약 십만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차량에 마이크를 달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조직적으로 전개된 난동에 의해 이들의 시위는 야간에도 철야 횃불시위로 계속 됐고 23시경에는 엠비씨 방송국이 전소가 되었으며 23시45분경에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 2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21일 02시에는 군중들이 광주 세무서를 습격, 방화하고 예비군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갈취하기에 이르러서 06시경에는 광주역과 KBS 월산동 사무실을 방화를 하고 시내에서 차량을 닥치는대로 탈취, 파괴한 후 09시경에는 방위산업체인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습격, 군에 납품할 장갑차를 비롯한 군용차량과 민수용차량 200여대를 탈취를 해서 화순,나주,담양,장성 등, 주변 소도시로 진출을 해서 경찰과 예비군의 무기를 탈취, 난동을 부리면서 시위를 계속 하였고 특히 난동자들은 복면과 마스크를 착용해서 화순광업소와 광주소재 한국화약 보급소를 습격하여 다량의 폭약, TNT와 35만 여개의 뇌관 등을 탈취하였습니다. 또한 21일 오후13시경부터 난동자들은 탈취한 기관총을 고층건물 옥상에다 설치해놓고 전남도청의 계엄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 간첩 및 좌익수 등이 수감돼 있는 광주교도소를 이날만도 세차례에 걸쳐서 장갑차를 앞세워 습격하여 계엄군과 교전함으로써 사상자를 내게하는 난동을 계속 자행하였으며 이날의 총격난동 과정에서 54명의 사망자가 발생을 했던 것입니다. 또한 난동군중들은 시민의 봉기를 선동하는 가두방송 외에도 용의주도하게 만들어진 지하신문, 요것은 5월18일부터서 26일까지 9호까지 발생이 됐습니다. 이런 하나의 지하신문을 통해서 계엄군의 섬멸을 선동하였고 12시경에는 민간점포인 금성센터에 난입을 해서 각종전자제품을 방화, 파괴를 하고 주요소를 습격해서 휘발유를 탈취하는 등 점차 그들의 방화, 파괴 및 탈취행위가 민간업체에까지 확대되는가 하면 나주시의 금성파출소 무기고를 습격, 칼빈 510정을 비롯해서 각종총기 770여정과 약11만발의 탄약등을 탈취를 해서 난동군중은 점차 대규모의 무장집단으로 화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날 있었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전각료의 사임을 우리의 투쟁으로 신총리 이하 전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대통령은 하야하게 됐다,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난동자들은 난동자들을 고무하고 시민들을 현혹을 해서 그들의 계엄군에 대한 저항을 더욱 강화할 움직임을 보였던 것입니다. 군은 무장 난동자들과의 충돌로 무모한 시민의 생명과 재산이 손해를 입히는 불행한 결과를 회피하기 위해서 21일 18시경에 계엄군을 외곽지대로 철수시켰고 철수과정에서 계엄군은 무장집단으로서부터 사격을 받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시내와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 봉쇄하는 한편 여타지역에서의 난동을 진압하면서 선무활동에만 주력하였으나 이날밤 남평쪽에서 버스를 타고 온 난동자들이 외곽 공수부대를 습격하는 등 계속 총기에 의한 격렬한 저항을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22일 광주시내는 무장난동자들이 완전히 지배하는 치안부재의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 무장집단들의 난동은 영광, 함평, 완도, 목포, 송정, 해남읍 등 전 전남일대로 계속 확산이 되었고 09시35분경에는 또다시 차량에 기관총을 설치를 해서 광주교도소를 습격, 계엄군과 총격전을 전개하는 한편 난동자들은 계엄군의 재진입에 대비를 해서 진지를 구축하고 이른바 시민군을 조직, 편성하는 등으로 시민의 호응과 합세를 유도를 하여 장기전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면서 도청앞 광장에서 시체를 진열을 하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한다는 구실하에 시민을 동원, 계엄군에 대항을 해서 끝까지 싸울 것을 선동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평소 원한관계에 있는 민가에 침입을 해서 가족을 몰살시키거나 금품을 약탈하는 만행을 저지르는 사건도 이 와중에서 발생을 하였고 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이 차츰 그들의 난동에 위협을 느끼고 이성과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23일에 이르러 그간 극에 달했던 난동자들의 방화, 파괴, 살인, 약탈 행위 등의 난동은 정부 및 계엄당국의 설득과 선무활동의 효과와 난동자들의 무차별적인 만행과 잔악행위의 혐오감과 의기의식을 느낀 시민 및 학생들이 이성회복과 자성에 의해서 수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주변지방에서의 습격과 무기탈취, 약탈행위가 지속되는 가운데 광주시내에서는 무장난동자 시체 59구의 전시와 호별방문에 의한 장례비 강제징수, 광주공원의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한 보급기지화 작업, 시내요소에 바리케이트 설치, 진지구축 등 반항적인 행동을 계속 하다가 19시경에 무장군중 중에 34명이 군부대에 투항한 것을 비롯해서 광주사태 수습위원회가 계엄군수를 방문해서 무기를 반납하는 등 계엄당국과의 대화를 통한 수습이 모색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저항할 것을 주장하는 강경한 세력들과의 의견충돌로 전반적인 수습에는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입니다. 특히 이들 난동자들은 광주에서의 봉기에 호응하여 전국각지에서도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실함대가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다는 등에 유언비어를 시내에 퍼뜨리면서 계속 저항자세를 굽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24일에 난동자들은 다시 저항자세를 강화하기 시작을 하였으며 특히 12시30분에는 도청 앞에서 위령제를 거행한다는 구실하에서 약 만오천여명이 집결하여 시민궐기대회를 여는 가운데 특정인의 화형식을 가졌으며 도청에서 그들의 요구사항을 결의하는가 하면은 시외곽에서는 난동집단들이 이동하는 계엄부대에 총기를 난사하는 등 사태가 조기에 수습될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25일에도 수습위원회 활동이 강온 양파로 갈라져서 각각 별도의 행동을 보여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서 강경파는 시민 5만명을 모아서 궐기대회를 열고 계엄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를 하였고 시가행진을 다시 실시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의 호응도가 더욱 줄어든데다가 난동자들이 계엄군은 못들어온다, 5일간만 견디면 된다고 선동을 하면서 대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시민들은 우리 시민군에 가담해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자고 충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계엄군이 진입하기 전날인 26일에는 계엄군에 일부차단지역에서 점차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가자 무장난동자들을 신속하게 기동배치하는 조직적 지휘와 기동성까지 발휘하였으며 계엄군이 약속을 위반해서 무력진주하려 하니 시민들은 궐기, 대항하자고 선동을 계속하여 이날 오후3시경 5천여명이 다시 궐기대회와 시민행진을 감행하게 됐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9일간의 광주사태 경위를 살펴보면은 일부 전남대생들이 계엄군에 대한 투석을 시발로 한, 격렬한 시내 시위와 이에 대한 계엄군에 대응과정에서 발생한 충돌로 인해서 발단이 되었으나 외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배우조종과 유언비어 유포를 통한 교묘한 선동을 통해서 광주시민의 지역감정을 촉발, 흥분시킴으로써 사태가 극도로 악화됐던 것입니다.

무력진압의 경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광주사태가 무장난동자들에 의해서 무정부 상태하에서도 군은 끝까지 무익한 자극과 시민의 피해를 염려를 해서 최소한의 자위권마저도 자제를 해왔고 비록 군인이 난동자에게 잡혀 무참히 학살되는 상황하에서도 사태악화 방지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것입니다. 또한 계엄군이 시내에 머물러 난동자들과 대치하는 것이 시민들에게 더 큰 자극을 주는 것을 우려를 해서 5월21일에는 시외곽으로 철수, 봉쇄에 만전을 기하면서 시민자체의 수습노력을 지켜보는 최대한의 임무를 감수를 하였고 5월22일 당시 박충운 국무총리서리께서 취임초일에 현지에 도착, 시민에게 자제와 진정을 호소하는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5월25일 최규하 대통령각하께서도 현지에 도착하여 간곡하고도 절실하게 자제와 질서회복을 호소하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였으며 계엄사령관도 무기, 탄약, 폭발물 소지자는 폭도로 오인되니 무기, 폭발물의 소지금지와 해산을 종용을 하는 경고문, 전단 42만매를 살포하고 항공기와 차량방송을 통해서 계속적인 선묵활동을 전개하였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었으며 더욱이 시민군을 자처하는 난동자들은 외곽 야산지대에 진지구축과 주요도로변에 탈취한 기관총을 배치를 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하여 장기 게릴라전을 획책을 하고 도청거점 내에서는 막대한 TNT 폭약을 장진, 자폭태세를 갖추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 양민을 위협하고 장기전을 획책했습니다. 무정부 상태가 지속됨에 따라서 광주시의 서민층은 생활필수품 및 의약품의 고갈로 극도의 생활고를 겪게됨에 따라서 집단범죄 발생이 우려됐으며 시민자치 능력에 의한 사태수습 및 치안회복의 가능성이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치안공백 상태의 장기화로 불순분자, 또는 북괴 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증대되고 있었습니다. 난동 6일째부터서는 선량한 시민의 흥분기세가 점차 진정됨으로써 무장난동자와 일반시민의 분리가 확인되어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작전을 실시할 여건이 조성이 되었고 무정부 상태하의 민생고를 조기에 해소하기 위하여 5월27일 0시를 기해서 작전을 실시하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