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참전은 결정됐다. 찬바람과 눈발을 무릅쓰고 중공군은 압록강 얼음판을 건너왔다. 쾡과리 나팔 피리를 불며 넘어왔다. 자그만치 30개 사단 30만 대군이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은 침략자의 탈을 쓰고 전선에 정면으로 나타났다. 당황한 유엔군 30만 대군은 무기의 빈약함을 인해전술로 대신했다. 불개미처럼 일시에 떼지어 밀고 내려온 것이다. 유엔군은 전선일대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중공은 한국 참전의 댓가로 소련에서 미그21기를 지급받아 한국전에 투입했다. 미국 제트기와의 공중전 중공군이 참전하자 북괴는 북한 주민을 총동원 물자보급을 시켰다. 일선 참호에 동원된 부녀자들 특히 젊은 여자에겐 이렇게 술병을 들려 보냈다. 유엔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됐고 작전상의 후퇴라는 대후퇴작전이 시작된것이다. 후퇴하는 유엔군 대열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시 북한에 있던 한국군은 차마 압록강을 떠나기가 아쉬워 주춤대다가 중공군에 포위되 한달동안 적중에서 헤매며 포위망을 돌파했던 사실도 있었다. 눈보라 속의 후퇴는 유엔군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저 아주머니는 어쩌다 길을 잃고 눈보라 속을 헤매는가 유난히 폭풍이 심했던 그해 겨울 동해안의 항공모함에서도 항공기의 이륙이 힘들었을 정도였다. 겨울 지상전에 익숙한 중공군 교량을 폭파하면 얼음물 속에서 또 임시교량을 만들어 낸다. 기관차에 물이 떨어지면 이렇게 인근 부녀자를 강제동원 했다. 중공군의 파상공격으로 육로길이 막히자 북한 지역의 유엔군과 피난민은 흥남으로 몰렸다. 그해 12월의 흥남부두 10만의 유엔군이 철수하는 현장이다. 질서있게 유엔군의 철수는 계속 됐고 국군도 철수선에 올랐다. 흥남 주변의 사주방어를 받으며 피난민도 피난민도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3개월이면 다시 돌아올수 있다는 약속하에 노 부모는 집에 남겨둔채 젊은 사람들만 피난길에 나선것이다. 당시 흥남에 몰려든 민간인 인파만도 무려 15만명이 넘었다. 군의 철수가 완료되야 민간인을 배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 서성대며 유엔군의 철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피난민 곧 북괴군과 중공군이 밀려올것 같은 불안과 초조속에 발을 동동 굴렀다. 마침내 승선의 기회가 주어졌다. 피난민은 사력을 다해 배로 돌진해 갔다.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밟고 밟히며 자유를 찾아 배에 올랐다.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이 부두를 떠날대 부두엔 아직도 피난민이 구름떼같이 있었다. 서로 쳐다보고 소리쳐 부르며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흥남의 산업시설은 북괴가 다시 남침에 다시 이용할것을 막으려고 모두 폭파해버렸다. 흥남의 부두시설도 후퇴하면서 폭파해버렸다. 중부전선에서의 유엔군의 후퇴 두달남짓 자유를 즐기다 피난길에 나선 북한 국민들은 그 수가 50만명에 이르렀다. 평양의 대동강 철교 곡예사처럼 철주를 타고 평안도 사람은 강을 건넜다. 남으로 향하는 가까운 길은 철길이다. 누구나 힘에 겨운 봇짐을 지고 사력을 다해 걸어갔다. 아무리 쏴도 중공군 숫자는 줄지가 않는다. 인해전술의 무서운 힘에 유엔군도 지치지 않을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