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당시 이 전쟁에서의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소련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것은 절대 극비로 취급되었습니다. 오직 소수의 계층만이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보통 국제바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점심무렵에 출발했습니다. 그는 하루에 80내지 100여건의 문서를 검토했습니다. 코스로비 체포는 보통 여기에 서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100여건의 문서에 결재해야 했기 때문에 문서를 검토하다가 이내 쉽게 지치곤 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보다 중요한 문서에만 이자니 혹은 유시프라고 서명하고 나머지는 훑어보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몇건의 문서에만 직접 결재를 했죠. 그런데 1월 어느날 그는 상당한 양의 문서를 검토하다가 북조선의 지도자인 김일성에 관한 문서를 접했습니다. 아시다싶이 그는 연합국인 우리와 미국인들의 지원으로 해방된 조선의 수령이됐죠. 그가 모스코바에 올 수 있도록 스탈린의 허락을 요청하는 문서였습니다. 스탈린은 직접 결재를 하지 않고 항상 스탈린의 구조지시사항을 받아 쓸 준비를 하며 대기하고 있던 코스코르비스 에프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오라고들 하시오. 그를 좀 만나봐야겠소. 방문 기간은 비실스키에게 협의하도록 하시오. 조선 인민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유명한 조직가이며 일본 식민주의자에 대양한 조선인민들의 무장투쟁 지도자인 김일성이 만장일치로 인민 정부의 수령으로 선출되었다. 김일성. 소련군 수자출신 1912년 농가에서 출생해 26살에 공산청년동맹에 가입. 청년운동 이끌다 체포되 투옥됨. 31살에 조선 공산당에 가입. 1940년 이후 북조선 민족 통일 전선 중앙위원회 위원장. 49년 3월 5일 회담이 열렸습니다. 스탈린의 응접실로 일행이 들어왔습니다. 스탈린은 보통 이들을 곧바로 만나주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우쩌둥마저도 일정시간동안 기다렸으며 가장 거물급 인사들도 30분 혹은 40분씩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탈린 개인의 성격이었는데 스탈린은 포츠담 회담에 갔을 때도 거의 24시간을 의도적으로 지각했습니다. 거기서 트루먼도 그를 기다렸고 처칠도 그를 기다렸습니다. 스탈린은 자신이 친히 만나준다는데 크나큰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결국 회담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열렸습니다. 저녁무렵에야 비로소 김일성을 불러들였는데 고위급 인사들이 그를 수행하고 있어 소련측에서는 비신스키, 스틸코프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통역 또한 해석했죠. 대화하는 시간이 길게 진행되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다루었습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눈여겨 지켜봤습니다. 김일성은 고문단 파견, 군사 전문가들의 파견, 철도 부설, 차관 제공 등 많은 것을 요청했습니다. 극비. 스탈린과 김일성간의 회담 속기록. 배석전, 비신스키, 스틸코프, 김일성. 스탈린 우즈가 어떻게 도착했소? 여행중 힘들지는 않았소? 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잘 도착했습니다. 소련정부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답했다. 이 후 회담내용의 발췌. 스탈린 동지는 남쪽 사람도 역시 북쪽군대에 간첩들을 파견할 것이며 조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일성은 그들은 남쪽 사람들이 북쪽 군대에 간첩들을 파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고유하고 있으며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스탈린 동지는 군사학교가 있냐고 물었다. 김일성이 군사학교가 있다고 대답하자 스탈린은 군대양성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내용원들을 접견하고 몇 개의 제정문제에 서로 약속한 뒤에 그들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후 남북한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온갖 방법으로 고문관을 통해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하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1950년 1월 19일 평양주재 대사 스틸코프가 보낸 매우 중요한 전문이 모스코바로 날아듭니다. 그는 오늘 중국대사의 북경환송식에 참석했습니다. 김일성이 술에 취한 상태로 내게 다가와 흥분된 어저로 자 보십시오 중국은 거의 모두 해방시켰습니다. 이제 조선의 시기가 왔습니다. 조선을 무력으로 통일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원조가 필요합니다. 나는 스탈린 동지가 우리를 지원해주기를 바라며 구체적인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줄 것을 요청합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즉각적인 답을 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1950년 1월 19일에 일이였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은 마우쩌둥에게 문의했습니다. 집회 중국 공산당 위원장이며 중국 인민의 지도자 마우쩌둥이 도착했습니다. 극비. 암호전문. 마우쩌둥 동지. 필리코프와 그의 측근들은 북조선 동조들과의 대담에서 조선인들의 통일 착수제안에 동의한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비신스키. 그러한 성격의 의견 교환이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스탈린과 마우쩌둥은 매우 자주 암호전문을 교환했습니다. 결국 스탈린은 그러한 암호전문에 교환 후에 북조선 사람들이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2월 9일 결정적인 문서가 작성되는데 스탈린은 2월 9일 김일성에게 전하도록 평양주재 소련대사에게 한 전문을 보냅니다. 이것은 매우 신중한 일입니다. 여러모로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의 보장이 있다면은 우리는 동의합니다. 만일 성공이 보장된다면 우리는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김일성은 모든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해 또다시 만날 것을 요청했습니다. 소련 국민들이 해외친구들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시위행렬에는 민주국가들의 깃발과 위대한 인민지도자들의 초상화가 물결치고 있습니다. 종합 인민 공화국과 소련국과의 우정은 확고합니다. 모스코바의 시민들은 외세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영웅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용맹스런 조선 인민들에게 열렬한 형제적 인사를 보냅니다. 근데 바로 여기에 다음과 같은 역사의 비밀이 있습니다. 정치국 고문서국에도 스탈린의 개인 서재에도 김일성이 다녀갔다는 데 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오겠다고 요청한 바 있고 스탈린은 김일성을 맞을 준비가 돼 있음을 전문을 통해서 답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간접적인 징후들을 통해서 김일성이 매우 짧은 일정으로 비밀리에 다녀갔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그는 공항에서 직접 스탈린의 별장으로 안내됐으며 그들은 그 곳에서 향후 전쟁에 대한 세부사항을 논의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지속된 왕래서신 그 강도가 훨씬 더 강했으며 그 일주일에 한번씩 전문이 오고갔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지난번 대화에서 귀하께서 말씀하신 탄약이나 포병화기 등 모든 것이 이미 도착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첫 번째 대화에서는 포병화기 나 탄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에 이는 분명 단독회담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담에서는 많은 얘기가 있었습니다. 중국인들도 도왔고 북조선에는 7개 사단이 있는데 3개 사단을 창설하여 10개 사단으로 늘려 전쟁준비를 하기로 했습니다. 단 한차례의 강력한 공격으로 소이 그들의 표현대로 전 남한을 해방시키기에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