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의 축제속에 공산분자들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일으켜 양민학살을 자행했다. 북한에서도 선거라는 것이 실시됐다. 그러나 인민의 대표를 뽑는다는 북한의 선거는 찬성이냐 반대냐를 묻는 흑백선거였다. 이것이 공산정권의 선거 제도이다. 김일성은 정권을 수립하기도 전인 48년 2월 소련의 지원을 받아 조선 인민군부터 창설하여 전술 전력을 강화해 왔다. 그리고 소련은 같은해 12월 북한으로부터 소련군을 일방적으로 철수해갔다. 그러면서 남한의 미군도 물러가라고 요구해 한반도에서의 힘의 공백을 노출시켰다. 여기는 1949년 3월의 모스코바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을 모스코바로 불러 겉으로는 조소경제문화협정을 맺고 비밀리에 무기반입을 내용으로 하는 군사 비밀 협정을 맺었다. 242대의 T34형 소련제 전차가 속속 북한으로 반입됐다. 또한 중공을 방문한 김일성은 어떠한 침략도 공동으로 대처한다는 내용의 방위 협정을 맺어놓았다. 이무렵 만주땅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중공군 소속 팔로군 한인계 병력이 남침에 앞장서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왔다. 북한 공산군은 이동 연예대를 편성해 농촌 여러지역을 돌며 남녀 청소년들의 군입대를 선동했다. 그동안 지원형식으로 모병하던 것을 강제 모병으로 바꾸고 18세부터 30세까지의 모든 북한 청소년들을 인민군대로 끌고 간것도 이무렵부터의 일이었다. 수풍댐과 같은 산업시설 공사장에 북한 주민들이 강제 동원되서 혹사당하기도 했다. 사냥개를 몰고 강제노동을 지휘하는 김책 그는 6.25때 남침에 앞장섰던 전선 사령관이었다. 그들은 또 무기를 포함한 각종 군수품 생산에 열을 올렸다. 전후 일본이 남기고간 한반도의 공업시설중 9할 이상이 38선 이북 북한땅에 편중되어 있었고 이러한 공업시설들을 모두 군수공장으로 바꿔서 밤낮없이 살인 무기와 장비들을 생산해냈던 것이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북한의 군사훈련은 완전 전투태세로 들어갔 다. 김일성은 그자신도 군복을 입고 인민군 총사령관으로써 침략준비를 지휘했다. 김일성은 이때 1950년은 조국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승리를 향해 전진하는 전체인민에게 영광이 있을것이라고 신년사에서 말했다. 훗날 소련의 최고 통치자가된 쿠르쇼프는 그의 회고록에서 1949년말 김일성은 그의 대표단을 인솔하고 스탈린과 회담하기 위해 모스코바에 도착했다. 그때 김일성은 남한에 대해 무력도발을 원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한에 한두번 자극을 주기만 하면 남한에서 내란이 일어나 인민의 힘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해올 가능성에 대해 염려했지만 김일성은 전쟁이 전격적으로 수행된다면 단시일내에 승리로 끝날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의 개입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 졌다. 크루쇼프는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말하면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완전한 성공을 기원했고 그들의 투쟁이 승리할날을 고대하며 건배했다고 기록했다. 결국 한국 전쟁은 북한이 주도하고 소련과 중공이 개입한 3자공모에 의한것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