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때 체포되어 오는 중공군에게서 이상한 첩보를 접할수 있었다. 당시 중공의 수도 북경에있던 조선관 전세가 불리해진 북한 김일성이 허정숙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북경에 보내 중공군의 참전을 요청했다. 수십만의 중공군이 한만국경을 넘어들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 이때 소련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3차대전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으나 모택동은 정규군대신 인민의용군 형식으로 참전하면 걱정이 없다면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강을 건너온 중공군은 30개 사단 30만 병력에 이르렀고 북한 인민군은 이들을 얼싸 안으면서 환영에 마지않았다. 중공군이 합류하면서 북괴군은 활기를 되찾아 전투는 새로운 양상으로 확대되 나갔다. 유엔군은 당황했다. 북괴군은 연약한 부녀자까지 동원하여 일선으로 밥을 나르고 술병을 들고 오도록 했다. 겨울 산악전투에 익숙한 중공군 그들은 때를 만난듯 날뛰었고 11월 24일 유엔군은 국경전선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중공군에 불의의 기습을 받아 눈속에 작전이 벌어진것이다. 후퇴하는 유엔군이 교량을 폭파하면 중공군은 수많은 인력으로 즉각 복구하는 것이었다. 12월 초의 흥남부두 10만을 넘는 전투요원과 15만 피난민이 남으로 가는 배를 타야할 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이 전개됐다. 유엔군의 엄호속에 적이 뒤쫓아 오기 전에 펼쳐야만 했던 작전이었다. 그 혼란속에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고 모인 가족들만이라도 배를타야만 했다. 배를 타느냐 못타느냐 하는것은 이들에게는 곧 사느냐 죽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뛰어가면서 까지 배에 오르려고 애썼다. LSD 한척에 12000명이나 타기도 했던 그때 아직도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부두의 피난민들은 배를 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삽시간에 울음 바다를 이루기도 했다. 배를 못탄 피난민들은 걸어서 가는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평양 끊어진 대동강 철교 그 미끄럽고 아슬아슬한 철주를 타고 남행길을 재촉하던 평안도 사람들 평양은 다시 공산군의 군화에 짓밟히고 말았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비워주고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한많은 1월 4일에 1.4후퇴 당시 120만 서울 시민과 북한에서 남하한 50만 동포가 함께 피난길을 떠났다. 남부여대 아이들을 안고 업고 짐을 지고 이고 서울을 떠나야만 했던 피난민들 어째서 이런 고초를 겪어야만 했던 것인지 몹시도 추웠던 그해 겨울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떠나야 했고 지금의 마포대교쪽인 마포강에도 피난민의 대열이 넘치고 있었다. 그당시의 영등포역 객차든 화차든 닥치는대로 타고 남쪽으로 가고 볼일이었다. 기차바퀴 그위면 어디든지 올라탔다. 화통에서 뿜어내는 증기가 얼굴에 닿아 얼고 부르트고 찢어지기도 했다. 얼어붙는 자신의 얼굴을 아기의 볼에 포개는 한엄마는 이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지 피난길에서 부모마저 잃은 저 아이는 대체 누구를 찾아가야 할것인지 떨어질세라 아이를 기관차에 잡아메는 어버이 이윽고 기차가 떠난다 일정한 시간도 없이 기관차나 차량이 마련되는 대로 떠나는 피난 열차였다.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큰 화를 만나야 하였던지 텅빈 주인없는 서울 서울은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비극의 행진은 남으로 갈수록 도도한 물결처럼 불어만 갔다. 수백만명에 이른 이 대열은자유를 찾아나선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8.15해방이후 소용돌이 치는 내외정세 속에서 방만한 자유에 흠뻑 젖어 정신차리지 못하고 우왕자왕 하다가 온겨레가 함께 격어야만 했던 비극이 아니었는지 40년 세월이 지난 오늘 또다시 이런 비극이 되풀이 하지 말란법도 없는것이 아닌가.수레를 끌고 수레바퀴를 지고 가는 피난민들 오늘날에는 피난자체가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6.25 그 비극의 의미를 곧추어봐야 할 오늘이다. 여기는 그당시의 부산 수백만 피난민들이 집결한 이 항구도시는 큰 혼잡을 이루었다. 전쟁 고아와 거지와 난민들 그 참담한 고통중에서도 먹어야했고 잠을 자야 했다. 먹는다는것 입는다는것 잠을 잔다는것 최소한의 생존의 조건을 갖추기도 어려웠던 그때 그 시절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와도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채 피난생활이 계속됐다. 전쟁중에 피난학교도 문을 열었다. 중학생과 국민 학교 어린이들이 뙤약볕 아래서 공부를 할수 있는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피난지에서 대학들도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부산에 있던 이화여자대학교의 임시 캠퍼스 김활란 박사가 보인다. 여기는 대구에 가있던 고려대학교 부산에서의 연세대학교 이러한 배움의 집념은 우리나라가 다시 일어서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