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상에서 하나뿐인 한반도는 다시 봐도 하나일 뿐인데 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휴전선이 오랫동안 남과 북을 갈라놓고 있다. 힘의 균형이 깨어지면 언제든지 뚫릴 수 있는 이 철책의 장벽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이틀 후 8월 8일에 나가사키 이 두 지역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위력 앞에 일본은 무조건 항복 제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가져왔고 우리 겨레는 해방을 맞이했다. 겨레의 함성은 서울에서도 평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반도에는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했다. 원폭 투하 이후에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에도 계속 남진해 8월 말까지 북한전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말았다. 북위 38도선 이남에 미국 군대가 진주한 것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보다 한 달이 늦은 9월 9일의 일이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조건으로 남과 북에 각각 미군과 소련군이 진주했던 것이다. 일장기가 내려지고 패전한 일본군은 도망치듯 떠나갔다. 전후 처리를 위해 편의상 그어놓은 북위 38도선이 그만 남북분단의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해외에 망명했던 동포들은 귀국선을 타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이승만 박사도 귀국했다.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한 상해임시정부 요인들도 돌아왔다. 해방 이듬해 3.1절 행사를 민주 진영과 공산 계열은 파고다 공원과 남산에서 별도로 가지는 등 좌우 분열의 양상이 시작됐다. 한편 평양에서는 조만식 선생을 비롯한 우익 진영을 제거하고 소련군 소령이던 33세의 김일성을 앞세운 소련이 북한의 공산기지화에 착수해 KGB 즉 비밀경찰에 테러수법 등을 동원 김일성의 권력장악 기반을 마련했다. 서울에서는 박헌영 중심의 남조선 노동당 세력이 공공연히 남한의 공산화를 획책하며 온갖 폭력수단을 다 동원하여 극심한 사회 혼란을 일으켰다. 노동자와 공무원의 조직까지 동원해 총파업에 돌입하고 청년학생층의 시위와 난동을 조정했다. 유엔 총회는 유엔 감시 아래 한국 통일을 위한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1948년 1월 유엔 임시 한국 위원단을 파견했다. 남한에서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북한 측은 이 위원단의 입국조차도 거절하여 통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때 김구 선생은 평양에 가서 남북 협상을 폈지만 북한의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돌아왔다. 유엔은 결국 자유총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38선 이남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같은 해 5월 10일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치루었다. 총선거는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라 3분의 1인 103개의 의석을 북한 지역을 위해 남겨 두기로 했다. 8월 15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의 독립과 정부수립을 온 세계에 선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