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이 임박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새벽을 기해 반공 애국포로 2만7천 명을 석방시켰다. 일차로 하게 된 정상포로 교환 협정에 따라 부상병은 교환이 이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캐리슨 유엔 측 대표와 공산 측 남일 대표 간에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2년간이나 끌다가 매듭지어진 것이다. 한국 측 대표는 협정 책에 서명하지 않고 퇴장해 버렸다. 휴전은 종식을 선거쪽으로 한 미국의 아이젠아워가 대통령으로 당선 된지 6개월 만에 소련의 스탈린이 죽은지 5개월 만에 미국 소련 양측이 위해 관계가 일치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인의 의사는 아랑곳없이 이루어 졌다. 여기서도 우리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볼 수 있다. 포로 교환 대전 전투에서 잡힌 미국거장도 돌아왔다. 중공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반공중공군 포로도 자유를 찾았다. 우리 국민은 이들을 거국적으로 환영했다. 155마일 휴전선이 그어진 채 전쟁은 끝이 났다. 아니 한국 측은 전정협정에 조인하지 않은 채 전투상태만 멎은 것뿐이다. 동난 3년 1개월의 결산은 무엇인가. 산더미 같은 포탄 찌꺼기는 그 전투의 치열했음을 말해 준다. 3.8선을 여섯 번씩이나 오르락, 내리락 했으며 포탄이 한국 산천을 점멸하면서 빗자루로 썰어 내리듯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도 아무런 소득 없이 싸움은 끝이 났다. 그 와중에도 한국민은 20명중 1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폐허를 더듬는 여인 이런 전쟁미망인만도 20만 명이 넘었다. 일시에 부모를 잃은 고아는 10만 명이 넘었다. 건물피해는 61만동에 이르고 해독불가(23:36) 하고 학살당하고 부상당하고 납치되었으며 행방불명된 민간인수는 전부 100만 명에 이른다. 국군 손실은 전사 부상 실종된 사람을 합쳐 98만 명 유엔군 손실은 17만 명에 이르렀다. 어쩌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길거리를 헤매다가 거지가 되었다. 이들은 살았으면 40대 장년이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흔적은 한없는 슬픔과 깊은 상처를 남겨 놨다. 도움의 손길을 찾는 길거리의 고아들 누가 이러한 민족의 비극을 저질렀는가. 이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보자 2차 대전 후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생겼다는 해독불가(25:00) 소련의 일환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꼭두각시 김일성을 시켜 이들의 가슴에 총칼을 꽃게 했던 6.25 이것은 결국 힘없는 약소국가가 그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역사의 피해가 아닐 수 없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저 열심히 기도했다. 아니 30년 전 그때 우리가 기도한 것은 무엇이며 지금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6.25는 힘없는 자유는 결국 침략과 악재를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교훈을 남긴 것이 아닐까 모든 국민이 구호양국 아니면 끼니를 잇지 못했던 전후의 우리 사회상 이었다. 휴전 조인 후 제네바에서 참전 16개국과 소련 중공 북괴 대표가 모여 고위정책회담을 열었을 때 북괴는 외국군 철수와 남북연방제를 들고 나왔다. 북한은 지금도 북괴가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한의 침해 중공 상태를 만들고 사회를 교란시켜 무력으로 또, 한번 남침을 하겠다는 것이다. 또, 한번 동족의 우리 가슴에 총을 쏘겠다는 것이다. 자식교육에는 유난히 열심힌 우리의 부모들 교실은 없어도 땅바닥 위에서나마 이렇게 가르쳤다. 미국 원조 없이는 길바닥 보수 교량공사하나 제대로 못했던 50년대의 우리 국력이었다. 이 50년대의 나라 형편과 60년대 70년대 우리가 피땀 흘러 이룩한 경영의 결실을 비교해 보자 그리고 80년대 길목에서 다시금 밀려오는 오늘의 시련을 견디고 일어서는 민족의 예견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자 6.25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155마일 휴전선이 남아 있는 한 그 휴전선 너머에 번득이는 총구가 아직도 우리를 노리고 있는 한 우리의 허점을 보일 수는 없다. 진정 내가 나라를 위하는 일은 무엇인가. 진정 생각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