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4월과 5월 중공군 함대 대 공세가 펼쳐졌다. 중공군 함대 공세에 유엔군은 서울 북방까지 밀렸다. 유엔군의 후퇴 길에 한국강산은 마지막화염으로 해독불가(7:34) 해 있었다. 4.5월 사이 중공군 75만 유엔군 45만 명 도합 120만 명의 대군이 한국참여에서 적도 했다. 의정부를 철수하는 유엔군 전선을 정비하기 위해서 유엔은 의정부 방위선에서도 후퇴 서울북방에 진을 쳤다. 이른바 링컨라인 중앙청에 진지를 구축하는 유엔군 이 전투에서 미군의 사력 앞에 중공군의 인해 전술도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래서 중공군의 함대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다. 인해전술과 화력전술의 일대 결전에서 전술은 유엔군 측으로 유리하게 기울었으나 후방기지의 봉쇄 없이는 완전히 승리 할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은 전세의 완전 역전을 위해 만주 폭격을 계속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청했다. 한편 중공군은 중대 공세에 실패하고 유엔주재 소련대표 만리크를 통해서 휴전을 제의했다. 피난민이 몰려든 북한 온정을 이룬 거리와 시장통 피난민이 먹고 있는 것은 우방이 보내준 구호양곡과 구호제품 뿐이었다. 온 국민이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산다는 것은 곧 생명을 부지해 간다는 것이 당시의 피난생활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해 시들어가던 자식들 아무 풀잎이던 끓여 먹이던 부모의 심정 아이들은 지쳐 잠들고 자국만 남아 지쳐 일어설 기력조차 없는 할머니들은 이렇게 숨져갔다. 병원에는 끊임없이 부상병들이 수송되었다. 여학생들이 손톱을 깎아 주고 없어진 팔을 대신해서 편지도 써 주었다. 손을 잃고 다리를 잃었지만 죽어가는 전우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상이용사들은 참의하며 지냈다. 전쟁 중에도 학교 문을 열었다. 비록 때약 볕 밑에서도 학생들은 공부를 했다. 북한의 이화여자대학교 임시교사 다른 대학도 문을 열었다. 내일의 조국을 위해 학생들은 배워야 했고 부모들도 끼니는 거를망정 자식교육에는 정성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