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은 슬픔을 딛고 우리 국군은 임진강을 건너고 잃었던 땅 개성도 되찾았다. 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에서 잠시 멈추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김일성 에게 항복을 권고한 것이다. 마침내 10월 1일 아군은 3.8선을 넘었다. 항복을 권고를 들을 턱이 없는 김일성이었다. 남침당시 북괴 병력은 11만 명에 이르렀으나 3.8선을 넘어 폐주한 북괴병사는 2만 5천 명 뿐이었다. 북진의 연도는 태극기의 물결이었다. 북한 주민들의 환영은 반격적이었다. 실로 해방이후 공산독재 밑에 있다가 5년 만에 맞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10월 10일 한국군 3사단과 수도 사단이 원산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거리거리 몰려 나왔다. 국군은 시민의 환영을 받을 겨를도 없이 직군 하였다. 원산에서의 양민 학살현장이다. 원산에서는 북괴군이 패주하면 시민이 남아있으면 국군에 협력할 것이라는 짐작만으로 무차별하게 학살하였다. 참으로 억울하고 기가 막힌 죽음이었다. 새 나라의 새 희망을 갖자는 명사심리 아름다운 원산항은 깨어진 배 조각만이 나뒹굴었다. 원산항으로 미군후속부대가 착륙하는 모습이다. 당시 동부에서 미 해병대는 장진으로 미 보병 7사단은 갑산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국인을 타도 근무하는 유엔군들 피난민을 가장한 간첩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한국군 1사단과 7사단은 평양을 향해 진격했다. 10월 18일 국군 1사단은 최전방의 최후 발악을 무시한 채 대동강을 건너 능라도로 올라갔다. 조선모와 국군의 입성을 환영하는 할머니 평양입성은 김일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버리는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입성 이틀 만에 국군은 평양을 완전히 탈환했다. 그리고 10월 30일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에 왔다. 이제 남북동포가 다함께 평화스럽게 살 수 있으며 멀지 않아 남북통일이 이루어 질 것이라는 대통령의 연설에 평양시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로서 답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