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의 참관아래 평양 북방의 숙청과 순청일대 낙하산 투하작전이 전개 되었다. 이 작전은 북으로 끌고 가는 포로를 그 길목에서 구출하자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유엔군 포로는 학살된 이후였다. 인도적인 국제 협약조차 지키지 않는 북괴였다. 유엔군 참모공작 비행기에서 스피커로 북괴군의 귀순을 종용하고 삐라를 뿌렸다. 한편 국군 정훈 부대도 참모공작을 계속 펴 나가고 있었다. 스피커를 설치하고 아코디언으로 유행가를 부르며 방송을 계속했다.

음악(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흘리며 )

많은 양민들이 북괴군의 위협을 무릅쓰고 손을 들고 넘어 왔다. 흥남에 상륙하는 유엔군 함흥에서의 수복환영대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했다. 극심한 핍박을 받던 북한의 크리스찬은 누구보다도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마음 놓고 하느님께 머리를 숙였다.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전선은 계속 북상했다. 백두산 방향의 혜산진으로 향하는 유엔군은 겨울이 성큼 다가온 추위 속에 험한 산굽이를 계속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전선은 심상치 않은 조짐도 있었다. 그 중에는 반동군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중부전선의 국군 박천을 거쳐 국군은 추워지는 날씨에 외투를 갈아입을 틈도 없이 압록강으로 발길을 자촉 했다. 신문들도 국경선에 가까워지는 전선소식에 들떠 있었다. 벌써 눈이 내렸다. 유엔군은 눈 속을 헤치며 혜산진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11월 21일 유엔군은 함만 북경선 압록강에 도달했다. 인적은 없고 유령도시 같은 혜산진 그리고 그렇게 와 보고 싶었던 압록강인데 국군 함병이 북경선 초선에 도달한 것은 혜산진 보다 한발 앞선 10월 26일 이었다. 정확히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의 일이었다. 국군은 압록 강물을 마시고 휘발유통에 담아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 이 기쁨을 온 국민과 같이 나누었다. 신문도 연내로 북한에서 선거를 실시할 것이라는 추측 기사를 냈다. 압록 강변 미군들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추수가 감사절도 끼여 본국에서 보낸 칠면조 고기로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중강진을 낀 이 일대에 겨울이 왔다. 그러나 모진 추위보다 더욱 쓰라린 현실이 닥쳐오고 있었다. 그것은 중공군의 개입이었다. 중공의 수도 북경의 조선발 전세가 불리해 지자 북괴는 허 정숙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북경에 급파했다. 구원병을 애걸한 것이다. 당시 소련은 중공의 한국참전이 3차 대전을 유발할 것을 걱정했으나 모택동은 정규군대신 인민 의용군 형식으로 참전하면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다. 중공군의 참전은 결정되었다. 찬바람과 눈바람을 무릅쓰고 중공군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꽹과리 나팔 피리를 불며 넘어왔다. 자그마치 30개 사단 30개 대군이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중공군은 침략자의 탈을 쓰고 전선에 정면으로 나타났다. 당황한 유엔군 30만 대군은 무기의 빈약함을 인해전술로 대신했다. 불개미처럼 일시에 떼지어 내려온 것이다. 유엔군은 전선일대에서 후퇴해야만 했다. 중공은 한국참전의 대가로 소련에서 미그기를 지급 받아 한국전에 투입했다. 미국 제트기와의 공중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