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이 참전하자 북한은 북한주민을 총동원 물자 보급을 시켰다. 일선 참모에 동원된 부녀자들 특히 젊은 여자에겐 이렇게 술병을 들려 보냈다. 유엔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고 작전상의 후퇴라는 대 후퇴작전이 진행되었다. 유엔군 후퇴를 바라보는 한 주민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시 조선에 있던 한국군은 차마 압록강을 떠나기가 주춤대다가 중공군에 포위도어 한 달 동안 적중에서 헤매며 포위망을 돌파했던 사실도 있었다. 눈보라 속의 후퇴는 유엔군에게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저 아주머니는 어쩌다 길을 잃고 눈보라 속을 헤매는가. 유난히 폭풍이 심했던 그해 겨울 동해안의 항공모함에서도 항공기의 이륙이 힘들었을 정도이다. 겨울 지상전에 익숙한 중공군 교량을 폭파하면 얼음물 속에서 또 임시 교량을 만들어 낸다. 기관차에 물이 떨어지면 이렇게 인근 부녀자를 강제 동원했다. 중공군의 파산 공격으로 육로길이 막히자 북한지역에 유엔군과 피난민은 흥남으로 몰렸다. 그해 12월에 흥남부두 10만의 유엔군이 철수하는 현장이다. 질서 있게 유엔군의 철수는 계속 되었고 국군도 철수 선에 올랐다. 흥남주변의 파주방어를 받으며 피난민도 흥남부두로 몰려들었다. 한겨울이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 하에 노부모는 집에 남겨둔 채 젊은 사람들만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당시 흥남에 몰려든 민간인 인파만도 무려 15만 명이 넘었다. 군의 철수가 완료되어야 민간인을 배에 태울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 서성대며 유엔군의 철수를 안타깝게 지켜보던 피난민 곧 북괴군과 중공군이 밀려올 것 같은 불안과 초조 속에 발을 동동 굴렸다. 마침내 승선의 기회가 주어졌다. 피난민은 사력을 다해 배로 달려갔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에겐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였다. 밟고 밟히며 자유를 찾아 배에 올랐다. 12월 24일 마지막 철수선이 부두를 떠날 때 아직도 부두엔 피난민들이 구름 때 같이 있었다. 서로 처다 보고 소리쳐 부르며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흥남의 산업시설은 북괴가 다시남침의 기회로 이용할 것이라고 모두 폭파해 버렸다. 흥남의 부두 시설도 후퇴하면서 폭파해 버렸다. 중부전선에서의 유엔군의 후퇴 두 달 남짓 자유를 즐기다 피난길에 오른 북한 주민은 그 수가 50만 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