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침략군의 깃발 친 서울이다. 겁에 질린 시민들은 숨어다니기에 바빴다. 거리마다에는 이렇게 서민들을 인민군으로 강제 모집하고 시민들을 강제노동에 참여시키는 등 시민을 괴롭혔다. 강제노동장에는 남녀소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동원했다. 공산당에 비협조적이란 이유만으로도 반동군자로 몰아 인민재판을 벌여 길거리에서 무차별 학살했다. 평양거리. 공산당은 제네바협정도 무시한 채 UN군 포로에게 허위 반전 허락 카드를 들리워서 길거리에 걸고 다녔다. 소이 인민 의영군 모집과 훈련 현장이다. 여자까지 끌어다 학교 운동장에서 하루이틀 훈련시키고 전선에 내몰았다. 힘도 제대로 못쓰는 청소년 소녀들을 전선의 총알받이로 투입시킨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낙동강 해독불가(30:48)에서 희생됐다. 치열한 공방전으로 폐허가 된 포항. 피난갔다 돌아온 주민들은 돌아갈 집도 없었다. 강원도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함께 송도해수욕장 모래뻘에서 이렇게 지내야만 했다. 그당시 젊은 학도들도 해독불가(31:29) 전선에 뛰어들었다. 포항지구의 공방전은 1개월에 거친 대접전이었다. 이 곳에서 조국을 위해 못다핀 꽃송이처럼 죽어간 수많은 학생들. 의당이 있어야 할 군번도 계급도 이들에겐 없었다. 평소 훈련을 받지 못한 학도병들은 잘 훈련된 북괴병에 당할 수가 없었다. 대구 국방 갑오동 이 곳이 뚫리면 대구가 위험하다. 북괴군은 대구 점령을 목표로 8월 총 공세를 선거했다. 당시 김일성은 충북 수안부에 있는 공산군 전선사령부까지 와서 낙동강 교도부 돌파를 독려했다. 갑오동 골짜기엔 부서진 적탱크가 수없이 깔려있었고 이 전투에서 북괴군 일사단의 병력중 2/3가 사살당하고 물러났다. 영천회전이다. 대구공략에 실패하자 북괴군은 방향을 바꾸어 9월 총공세를 펴 영천방면으로 공격해왔다. 9월 5일 한국군 팔사다은 북괴군의 기습공격으로 한 때 영천을 적의 수중에 넘겨줘야했다. UN군의 대반격. 만약 이 지역을 빼앗기면 우리는 갈 데가 없다. 국군은 전후의 기세를 넘고 또 넘으며 화력을 다해 싸웠다. 9월 10일 국군은 영천을 대탈환했으며 북괴군 15사단은 완전히 부서졌다. 괴뢰군 포로. 그 중에는 어린병사도 많았다. 대부분 남한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동원되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이들은 발목에 해독불가(36:56)를 묶어 후퇴하지 못하도록까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