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은 상륙 후 24시간 만에 인천을 해안로 도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인천이 수복되는 순간 지옥보다 참혹했던 붉은 지하에서 숨어살던 시민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불렀다. 인천상륙에 참여한 손호일 해군참모총장이 국군 민간인 적군 부상병 치료를 돌보고 있다. 서울 탈환작전이 지체 없이 진행 되었다. 지휘대는 9월 17일에는 김포 비행장을 점령하고 인천상륙 나흘 후 영등포에 진입했다. 마침내 서울을 건너다보며 노량진의 전야를 정비했다. 후퇴한 후 80여일만인 9월 20일 국군과 유엔군은 한강을 건넜다. 서울은 불타고 있었다. 북괴는 철원과 낙동강 전선의 일부 병력까지 투입 서울을 제 2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려고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 것이다. 특히 세종로 일대에는 적들이 20미터 간격으로 반공호를 파 놓고 기관총과 박격포로 최후까지 반격했다. 그러나 이들을 소탕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드디어 9월 27일 새벽 6시 우리 해병용사들이 중앙청에 태극기를 걸었다. 서울역과 남대문사이의 거리다. 오백년 서울을 지킨 문화의유산도 포탄에 부서지고 말았다. 수복 이틑 날 정부는 재빨리 환도했다. 맥아더 원수가 도쿄에서 날아오고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에서 올라와 50여명의 정부 각료 유엔군 장성이 참여한 12시 정각 서울은 대한민국 정부로 임계가 된 것이다. 서울이 피란되고 낙동강 전선이 무너지자 피난민들은 자기 고향을 찾아 가기 시작했다. 모진 고난을 이기며 100일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피난민들 그러나 그곳에는 불탄 집과 시체뿐이다. 과히 하늘 덮은 시체더미 정부 관리와 그 가족 군경가족 정부 사회지도급 인사와 가족은 반동분자로 몰려 무차별 학살 되었다. 적 치하에서 학살된 숫자는 약 13만에 이른다. 그 외에도 납치되고 행방불명 된 사람까지 합치면 50만 명이 된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죽었으면 시체는 어디에 있는지 방황했던 가족 너무나 엄청난 절망에 수많은 여인들은 기절하고 미쳐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공산당이 무엇이며 북괴 공산당의 잔인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살아남아야만 했다. 폐허를 딛고 일어서야만 했다. 유엔군의 희생도 컸다. 임시로 마련된 유엔묘지와 예를 갖추는 현지 주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