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독불가(24:46) 마고되어 한 달 이상 적중을 헤매다 포로가 됐다. 김석원 장군의 수도사단 17연대는 경북 황주의 화령장 전투에서 북괴 박성철의 15사단에 큰 파격을 가했다. 후퇴만 했던 당시의 현황으로는 큰 성과가 아닐 수 없고 남하하는 적을 지연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경주였다. 8월에 접어들어 한반도의 95%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대구 북방 낙동강 방어선을 주축으로 약 보름동안 기아간의 일대 혈전을 벌였다. 북괴군은 외관 지구 낙동강도 넘었다. 그리고 대구 근처 갑오동까지 밀고 내려와 대구를 집중 공격해왔다. 대구의 피난민들. 한 때 갑오동에서 세운 적의 포탄은 대구시 근방에도 떨어졌다. 대구로 피난 온 정부도 대구 사수를 결심했다. 대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 부산까지 밀리기 쉽기 때문이다. 부산 매일같이 병력 군장비 군수품이 들어왔다. 당시에 미8군 사령관은 워커중장이었다. 한국에 군대를 보낸 참전국은 미국, 호주, 영국, 벨기에, 캐나다, 콜럼비아, 에콰도르, 미디오피아, 프랑스, 네덜런드, 뉴질랜드, 태국, 터키, 남아 연방, 그리스, 필리핀 등 16개국이며 기타 원조국가를 합하면은 40여개국에 이른다. 한국군에도 대포가 지급됐다. 미 7함대의 출동. 전선은 UN의 기치아래 공격의 주도권을 공군 습격에서부터 되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