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 3개월만에 여수에서는 공산집단 40여명이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무차별 학별하고 송의 수색을 인근 순원청까지 넓혀갔다. 이것이 여수순천 반란사건인데 공산출동은 제주도와 해독불가(5:39) 잇따라 일어났다. 정부수립과 때를 같이해서 군의 발족도 봤다. 1948년 9월 국방정비대가 육군으로 해안정비대를 해군으로 개편하고 뒤이어 해병대 공군의 발촉으로 비록 장비는 빈약했지만은 대한민국 군이 탄생했다. 한편 북한은 어떠했는가. 해방직후 평양에는 소련군 특보원이었던 30대의 김성주가 김일성의 이름을 빌어 군중앞에 나타났다.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1948년 8월 25일 흑백선거를 통해서 내각 수상이 됐고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이북에는 과거 일본이 대륙상공을 위해 세워준 전략적인 산업시설이 있었다. 수풍댐 발전량은 당시 한반도 전체 전력의 92%를 차지했다. 연 산업기술 복구에 북괴 공산당은 일정때보다도 더 가혹하게 주민들을 강제 동원했다. 6.25당시 북괴군 전선사령관이었던 김책이 강제 노동장의 현장을 시찰하는 모습이다. 북괴의 남침 준비현장을 추적해본다.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고 이듬해 정월 특별군사 사절단을 평양에 파견했다. 이들은 18개월내에 북괴군의 전쟁수행 능력을 양성할 사명을 띠고 온 것이다. 공산당 특유의 조직과 강제력을 동원한 김일성의 남침 준비는 치밀했다. 김일성은 중공과 더불어 상호방위조약을 맺어 남침에 대비한 공동전선을 구축해놓았다. 특히 김일성은 만주에서 오랜 전투 경험을 쌓은 중공군 소속 팔로군 중 이만명의 한인제 병력을 북한으로 데려왔는데 이들이 남침의 주력부대로 편성됐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모스코바에 가서 겉으로는 해독불가(8:46)경제문화협정이라는 것을 맺고 비밀리에 무기반입을 주요내용으로 한 군사기밀협정을 맺었다. 확인에 서명. 소련제 탱크가 북한으로 반입됐다. 남침의 주력이었던 T34형 탱크 242대가 속속 전선에 배치됐다. 농촌 이동 면회회 남녀청소년들의 군대입대를 선동하는 현상이다. 북괴는 그동안 지원형식모병을 강제모병으로 바꾸고 18세부터 30세까지 인민군으로 끌어갔다. 해독불가(9:57)공장도 땅 밑으로 들어갔다. 당시 북한에는 우리나라 석탄내장량의 71% 비료공장, 개량소 등 금속공업생산이 83% 광업자원 70%라는 유리한 산업자원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괴는 남한에서는 생각도 못한 박격포, 따발총, 탄환을 이렇게 생산해 내고있었다. 1950년에 접어들어 북괴의 남침준비는 완료됐다. 1950년 신년사에 김일성은 작년에 우리는 조국통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반드시 조국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다짐한다고 말했다. 북괴는 야크기 200여대도 소련에서 받았다. 평온한 서울거리. 그러나 이 평온속에 북괴의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몰랐다. 북괴는 북에서는 남침준비를 하면서 서울에서는 공산당 지하조직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교란을 획득하고 있었다. 한 때 공산당은 국회에도 침투 주한외국군의 철수를 종용하는 결의문을 내는가 하면은 국회부의장 김야수를 포함한 소이 국회 해독불가(11:42)사건도 일으켰다. 6.25동란 전해인 1949년 6월 29일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모두 철수해버렸다. 미국 트루만 대통령과 국무장관 니스트는 6.25가 활발하던 해 1월 미국에 극동 방위선 문제를 이렇게 발표했다. 즉 미기도에서처럼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내에 한국과 대만은 미국방위선에 제외시킨다는 것이었다. 긴박한 정세 속에 우리 국방력은 어떠했는가. 여기 서해안을 낀 38선 인근 운진반도의 향토방위대의 모습이 당시 국방력을 잘 상징해준다. 무기가 없어 이렇게 곡창이나마 들고 향토방위에 나섰던 주민들. 38선을 지키던 우리의 국군이다. 미군을 철수해버렸고 정부의 계속된 무기 원조 요청도 응답없는 메아리에 그쳤다. 달구지로 보급품을 나르던 국군장교. 일선 거지로 보급됐던 주먹밥은 매서운 추위로 굳어있다. 국군부대를 찾은 연예인들이다. 당시 국군의 병력은 10만명으로 북괴의 절반이었고 장비는 장갑차 27대 박격포 900여문밖에 없었다. 공군은 L4 L5 T6등 연습용 경비행기 22대뿐이었다. 6.25 발발 한달전 남한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전 국민이 들떠있었고 남침 준비를 마친 북괴는 6월 7일 남북 총선거를 제의했고 조만식선생과 남로당의 김삼룡 이규하를 교환하자는 등 위장평화공세를 해독불가(14:32) 정부는 설마 북괴가 남침해오겠느냐는 안심속에 6월 22일에는 군의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전 병력의 1/3의 해당하는 장병들에게게 15일간의 모내기돕기 휴가를 주어 고향에 내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