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거제도 포로 수용소다. 이곳에는 17만의 포로들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이가운데 반이 넘는 10만명이 북으로 송환되기를 거부한 반공 포로들이었다. 유엔군 측은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포로들에게 그림그리기 조각등 특기를 살리게 했다. 뿐만아니라 재봉일 인쇄작업 해독불가(18분51초) 공작등 기술 교육까지 시켜주었다. 그런데도 공산 포로들은 북괴기와 스탈린 화상을 들고 다니며 시위를 벌이는등 소란을 피웠다. 목총을 만들어 수용소 내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인민재판을 열어 동료들을 고문 암살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없이 자행했다.더욱이 폭동 사건을 유발해서 수용소 소장을 납치하는가 하면은 칼 곡괭이 등으로 무장해서 반공포로의 막사를 습격해 수용소를 온통 피바다로 바꿔놓기도 했다. 유엔군측의 인도적 대우를 역으로 이용한 악랄한 공산 포로의 행위였다. 휴전이 임박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3년 6월 18일 새벽을 기해 반공 애국포로 2만 7천명을 석방 시켰다. 1차로 합의된 전상포로 교환 협정에 따라 부상병 교환이 이뤄졌다. 1953년 7월 27일 헤리슨 유엔측 대표와 공산측 남일 대표간의 정전협정이 조인됬다. 2년간이나 끌다 매듭지어진 것이다. 한국측 대표는 협정서에 서명하지 않고 퇴장해 버렸다. 휴전은 전쟁종식을 선거 구호로 한 미국의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당선된지 6개월만에 소련의 스탈린이 죽은지 5개월만에 미국 소련 양측이 이해관계가 일치되어 이뤄진 것이다. 한국인의 의사는 아랑곳 없이 이뤄졌다. 여기서도 우리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볼수가 있다. 포로교환 대전 전투에서 잡힌 딘 소장도 돌아왔다. 중공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 반공 중공군 포로도 자유를 찾았다. 우리 국민은 이들을 거국적으로 환영했다. 155마일 휴전선이 그어진채 전쟁은 끝이 났다. 아니 한국측은 정전협정에 조인하지 않은채 전투상태만 멎은것 뿐이다. 동란 3년 1개월의 결산은 과연 무엇인가. 산더미 같은 포탄 껍데기는 그 전투의 치열했음을 잘 말해준다. 38선을 6번씩이나 오르락 내리락 했으며 포탄이 한국 산천을 작렬하면서 빗자루로 쓸어내리듯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도 소득없이 싸움은 끝이 났다. 그 와중에서 한국민은 20명중 한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폐허를 더듬는 여인들 이런 전쟁 미망인만도 20만명이 넘었다. 일시에 부모를 잃은 고아는 10만명이 넘었다. 건물 피해는 61만동에 이르고 사망하고 학살당하고 부상당하고 납치됐으며 행방불명된 민간인 수는 전부 백만명에 이른다. 국군 손실은 전사 부상 실종된 사람을 합쳐 98만명 유엔군 손실은 17만명에 이르렀다. 어쩌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이렇게 길거리를 헤매며 거지가 됐다. 이들은 살았으면 지금쯤 40대의 장년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흔적은 한없는 슬픔과 깊은 상처를 남겨놨다. 도움의 손길을 받는 길거리의 고아들 누가 이러한 민족의 비극을 저질렀는가 이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보자 2차대전후 단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해독불가(24분48초) 소련의 해독불가(24분50초)의 일환으로 탱크를 앞세우고 꼭두각시 김일성을 시켜 이겨레의 가슴에 총칼을 꽂게했던 6.25 이것은 결국 힘없는 약소 국가가 그 민족이 겪어야만 했던 역사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저 열심히 기도했다. 아니 30년전 그때 우리가 기도한것은 무엇이었으며 지금 우리가 기도한다면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 6.25는 힘없는 자유는 결국 침략과 악세를 스스로 불러들인다는 교훈을 남긴것이 아닐까 모든 국민이 구호양곡 아니면 끼니를 잇지 못했던 전후의 우리 사회상이었다. 휴전 조인후 제네바에서 참전 16개국과 소련 중공 북괴 대표가 모여 고위 정치회담을 열었을때 북괴는 외국군 철수와 남북 연방제를 들고 나왔다. 이 내용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북괴가 똑같이 주장하고 있다. 말하자면 남한을 힘의 진공 상태를 만들고 사회를 교란시켜 무력으로 또한번 남침을 하겠다는 주장이다. 또한번 동족인 우리의 가슴에 총을 쏘겠다는 뜻이다. 자식 교육에는 유난히 열심이었던 우리의 부모들 교실은 없어도 땅바닥 위에서 나마 이렇게 가르쳤다. 미국 원조 없이는 길바닥 보수 교량공사 하나 제대로 못했던 50년대에 우리 국력이었다. 이 50년대에 나라 형편과 60년대 70년대 우리가 피땀흘려 이룩한 번영의 결실을 비교해보자. 그리고 80년대의 길목에서 국내외로 다시금 밀려오는 오늘의 시련을 견디고 넘어서는 민족의 예지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6.25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다. 155마일 휴전선이 남아 있는 한 그 휴전선 너머에 번득이는 총구가 아직도 우리를 노리고 있는한 우리의 허점을 보일수는 없다. 진정 내가 나라를 위한 길이 무엇인가 다시한번 생각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