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난민이 몰려든 부산 혼잡을 이룬 거리와 시장통 피난민이 먹고 있는 것은 우방이 보내준 구호양곡과 구제품 뿐이었다. 온국민이 거지신세를 면치 못했다. 산다는 것은 곧 생명을 부지해간다는것이 당시의 피난생활이었다.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해 해독불가(10분 46초)가는 자식들 아무 풀잎이든 끓여먹이던 부모의 심정 아이들은 지쳐 잠들고 가죽만 남아 일어설 기력도 없이 할머니들은 이렇게 숨져갔다. 병원에는 끊임없이 부상병이 후송됐다. 여학생들이 손톱을 깎아주고 없어진 팔을 대신해서 편지도 써줬다. 손을 잃고 다리를 잃었지만 죽어간 전우보다는 낫지않겠느냐고 상이용사들은 자위하며 지냈다. 전쟁중에도 학교문을 열었다. 비록 뙤약볕 밑에서 나마 아이들은 공부를 했다. 부산의 이화여자대학교 임시교사 다른 대학도 문을 열었다. 내일의 조국을 위해 학생들은 배워야 했고 부모들도 끼니는 거를 망정 자식 교육에는 정성을 다받쳤다.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맥아더 원수는 중공 폭격발언을 했고 미 트루먼 대통령은 국지전을 고집하고 있었다. 결국 맥아더는 51년 4월 11일자로 해임됬다. 맥아더는 미 의회에서 노병은 죽지않고 오직 사라질뿐이라는 명 연설을 마치고 미국 시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군복을 벗었다. 1951년 7월 10일의 개성 처음으로 휴전을 전재로한 유엔측과 북괴측의 접촉이 있었다. 당시에 유엔군 총사령관은 릿지웨이 장군이었다. 본격적인 휴전회담 한국측은 백선엽 장군 유엔측은 조이제독 북괴측 대표는 남일 이었다. 유엔군 측을 1개월 정도면 휴전협정에 조인할수 있으리라 낙관했다. 그러나 북괴측은 처음부터 회담을 정치 선전장으로 이용하며 미국군의 철수 문제부터 제기했다. 한국측에는 이 회담으로 비관과 좌절을 안겨주었다. 전국이 초토화 되고 수많은 국민이 희생된채 6.25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남북병사의 대화와 마주보고 사진찍는 기자들 순수하게 임해온 유엔군측도 공산당의 본성을 보고 이 회담이 오래갈것을 예측했다. 회담중에는 이런 사례도 있었다. 원칙으로 휴전 회담장에는 무기를 지니지 못하도록 되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기를 숨겨오고 회담장 주변에서 침입해오려는 무장한 북괴병도 있었다. 국제적인 관례도 모르는 북괴군의 실상이 아닐수 없다. 회담장은 아이들의 구경거리도 됐다. 유엔군은 북괴에 압력을 가하고자 계속 화력을 퍼부었다. 원산의 함포사격 여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회담장은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졌다. 그해 겨울 휴전선과 비무장지대 결성에 관한 협의가 이뤄지고 있었다. 휴전선은 협정 조인때의 전선을 기준으로 하기로 협의했다.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 한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전투는 치열했다. 전선은 제자리 걸음에 고지 쟁탈전으로 변했다. 해독불가(17분14초) 벙커 실, 피의 능선, 번치볼등 사투를 다한 전투는 수없이 많았고 백마고지 전투에서는 한차례 출격에서 60만톤의 폭탄이 떨어졌다. 22만발의 포탄세례를 퍼부었다. 고지의 주인도 무려 20번씩이나 바뀐 끝에 한국군이 차지했다. 전선의 황야는 풀한포기 살아남은것 없이 초토화 됐다. 귀순하는 북괴 병사도 많았다. 유엔군이 살포한 삐라를 들고 사지를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