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은 그해 크리스 마스를 철수길에 맞이했다. 피난길에 한국 아이들 유엔군이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에 철없는 아이들은 즐겁기만 하다. 음식이 많아도 그릇 앞에서부터 아껴먹는 아이들 이들이 살았다면 지금쯤 30대 후반이 됐을것이다. 원한의 38선을 또 뒤로 두고 철수하는 병사들 이 민족의 비극을 38선은 지켜보고 있다. 정부는 서울 시민에게도 피난령을 내렸다. 이것이 한많은 1.4후퇴였다. 6.25가 일어났을때 생각을 해서 시민들은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서울역 근처에 남대문 거리다. 서울역을 매운 피난민들 언제와서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기차를 마냥 기다렸다. 그 지루함을 뜨개질로 메꾸는 아주머니 당시 서울 시민은 120만명이었다. 북에서 남하한 50만명과 함께 한강으로 향하는 길은 큰 혼잡을 이루었다. 수난의 한강은 얼어붙었다. 김포공항에서의 유엔군 고아수송 작전이다. 헤스대령의 얘기를 전송가라는 영화로도 제작한 실제 현장인 것이다. 객차든 화차든 올라갈수 있는곳은 다 올라탔다. 굶주린 배를 채워주던 얼어붙은 찬 도시락 화통 연기와 뿜어대는 증기에 견뎌야만 했다. 얼어붙는 아기 얼굴을 자기 얼굴로 녹히려는 엄마의 모정 두려움과 겁에질린 아이들의 눈망울 떨어질까봐 화통에 아이를 메어놓는 아버지 화통에서 뿜어대는 증기는 얼굴에 닿자 곧 얼어붙는다. 이윽고 기차는 떠난다. 일정한 시간도 없이 기관차나 차량이 마련되는 대로 떠나는 피난 열차였다. 인천항이다. 인천역에도 피난민은 몰려들었다. 이것은 먼 얘기가 아니다 바로 30년전 우리가 겪었던 일이다. 운좋은 사람들은 배를 탔다. 고기잡이 배든 조각배든 가리지 않았다. 인천의 시설물은 폭파됐다. 세 번이나 당하는 파괴에 인천은 완전히 피허가 되버렸다. 텅빈 주인없는 서울 중공군이 38선을 넘은것은 1월 3일이었고 계속해 서울로 진격해 들어왔다. 비극의 행진은 남으로 갈수록 불어만 갔다. 산골짜기 농민들도 집을 나섰다. 좁은 오솔길로 피난짐을 끌고가자면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장님까지 피난길에 올랐다. 오도한 물결처럼 불어만 가는 피난민들 실로 자유를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다. 그 수는 무려 200만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