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한 공방전으로 폐허가 된 포항 피난갔다 돌아온 주민들은 들어갈 집도 없었다. 강원도 쪽에서 내려온 피난민들과 함께 송도 해수욕장 모래뻘에서 이렇게 지내야만 했다. 그당시 젊은 학도들도 분연히 궐기 전선에 뛰어 들었다. 포항 지구의 공방전은 1개월여에 걸친 대접전이었다. 이곳에서 조국을 위해 못다핀 꽃송이처럼 죽어간 수많은 학생들 의당 있어야 할 군번도 계급도 이들에겐 없었다. 평소 훈련을 받지 못한 학도병들은 잘 훈련된 북괴병에 당할 수가 없었다. 대구 북방 자부동 이곳이 뚫리면 대구가 위험하다. 북괴군은 대구 점령을 목표로 8월 총공세를 전개했다. 당시 김일성은 충북 수안보에 있는 공산군 전선 사령부까지 와서 낙동강 교두보 돌파를 독려했다. 자부동 골짜기엔 부서진 적탱크가 수없이 깔려있었고 이 전투에서 북괴군 1사단의 병력중 3분의 2가 사살당하고 물러났다.

영천회전이 대교 공략에 실패하자 북괴군은 방향을 바꾸어 9월 총공세를 펴 영천방면으로 공격해왔다. 9월 5일 한국군 8사단은 북괴군의 기습공격으로 한때영천을 적의 수중에 넘겨줘야 했다. 유엔군의 대반격 만약 이 지역을 빼앗기면 우리는 갈데가 없다. 국군은 전우의 시체를 넘고 또 넘으며 체력을 다해 싸웠다. 9월 10일 국군은 영천을 재탈환 했으며 북괴군 15사단은 완전히 부서졌다. 괴뢰군 포로 그중에는 어린 병사들도 많았다. 대부분 남한에서 의용군으로 강제 동원되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이들은 발목에 쇠줄을 묶어 후퇴하지 못하도록 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