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많은 슬픔을 딛고 우리 국군은 임진강을 건너고 잃었던 땅 개성도 되찾았다. 북진하던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상에서 잠시 멎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고한것이다. 마침내 10월 1일 아군은 38선을 넘었다. 항복 권고를 들을리 없는 김일성이었다. 남침당시 북괴병력은 11만명에 이르렀으나 38선을 넘어 폐주한 북괴병사는 2만 5천명 뿐이었다. 북진의 연도는 태극기의 물결이었다. 북한주민들의 환영은 감격적이었다. 실로 해방이후 공산독재밑에 신음하다 5년만에 맞는 자유의 순간이었다. 10월 10일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이 원산에 입성했다. 시민들은 거리거리에 몰려나왔다. 국군은 시민의 환영을 받을 겨를도 없이 북으로 진군했다. 원산에서의 양민 학살 현장이다. 원산에서는 북괴군이 폐주하며 시민이 남아있으면은 국군에 협력할것이라는 짐작만으로 무차별 학살했다. 참으로 억울하고 기가막힌 죽음이었다. 새나라에 새희망을 갖자는 구호와 함께 명사십리 아름다운 원산항은 깨진 뱃조각만이 나뒹굴었다. 원산항으로 미군 후속부대가 상륙하는 모습이다. 당시 동부에서 미 해병대는 장진으로 미 보병 7사단은 갑산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한국인을 자주 검문하는 유엔군 피난민을 가장한 간첩을 가려내기 위한것이다. 한국군 1사단과 7사단은 평양을 향해 진격했다. 10월 18일 국군 1사단은 괴뢰잔당의 최후발악을 무시한채 대동강을 건너 능라도로 올라갔다. 두손 모아 국군 입성을 환영하는 할머니 평양 입성은 김일성의 사기를 완벽히 꺾어 버리는데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입성 이틀만에 평양을 완전히 탈환했다. 그리고 10월 30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평양에 왔다. 이제 남북 동포가 다함께 자유스럽게 살수 있으며 머지않아 남북통일이 이루어 질것이라는 대통령의 연설에 평양시민들은 열광적인 환호로서 답례했다. 맥아더 장군의 참관아래 평양 북방에 숙천과 순천일대에 낙하산 투하 작전이 전개됐다. 이작전은 북으로 끌고가는 유엔군 포로를 그 길목에서 구출하자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유엔군 포로는 학살된 이후였다. 인도적인 국제 협약조차 지킬줄 모르는 북괴였다. 유엔군 선무공작 비행기에서 스피카로 북괴군의 귀순을 종용하고 삐라를 뿌렸다. 한편 국군 정훈부대도 선무공작을 펴나가고 있었다. 스피카를 설치하고 아코디언으로 유행가를 부르며 방송을 계속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 많은 양민들이 북괴군의 위협을 무릅쓰고 손을 들고 넘어왔다. - 자주 고름 입에 물고 눈물젖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