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북한은 어떠했는가 해방직후 평양에는 소련군 첩보원이었던 30대의 김성주가 김일성의 이름을 빌어 군중앞에 나타났다. 김일성은 소련을 등에 업고 1948년 8월 25일 흑색선거를 통해서 내각 수상이 됐고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이북에는 과거 일본이 대륙 침공을 위해 세워둔 전략적인 산업시설이 있었다. 수통댐 발전량은 당시 한반도 전체전력의 92%를 차지했다. 연 산업시설 복구에 북괴공산당은 일정때보다도 더 가혹하게 주민들을 강제 동원했다. 6.25 당시 북괴군 전선 사령관이었던 김책이 강계 노동장을 시찰하는 모습이다. 북괴의 남침 준비현장을 추적해본다.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고 이듬해 정월 특별군사사절단을 평양에 파견했다. 이들은 18개월 내에 북괴군의 전쟁수행 능력을 양성할 사명을 띄고 온것이다. 공산당 특유의 조직과 강제력을 동원한 김일성의 남침준비는 치밀했다. 김일성은 중공과도 상호 방위 조약을 맺어 남침에 대비한 공동 전선을 구축해놨다. 특히 김일성은 만주에서 오랜 전투경험을 쌓은 중공군 소속 팔로군중 2만명의 한인계 병력을 북한으로 들여왔는데 이들이 남침의 주력부대로 편성됐다. 1949년 3월 김일성은 모스크바에 가서 겉으로는 조소 경제문화협정이라는 것을 맺고 비밀리에 무기반입을 주요내용으로한 군사비밀협정을 맺었다. 스탈린의 서명으로. 소련제 탱크가 북한으로 반입됐다. 남침의 주력이었던 p34형 탱크 242대가 속속 전선에 배치됐다. 농촌 이동 연예대 남녀 청소년들의 군대 입대를 선동하는 현장이다. 북괴는 그동안 지원형식 모병을 강제 모병으로 바꾸고 18세부터 30세까지 인민군으로 끌어갔다. 군수공장도 땅밑으로 들어갔다. 당시 북한에는 우리나라 석탄매장량의 71% 비료공장 제련소등 금속공업생산이 83% 광업자원 70%라는 유리한 산업자원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괴는 남한에서는 생각도 못한 박격포, 따발총, 탄알을 이렇게 생산해내고 있었다. 1950년에 접어들어 북괴의 남침준비는 완료됐다. 1950년 신년사에서 김일성은 작년에 우리는 조국통일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금년에는 반드시 조국 통일을 위한 해가 되기를 다짐한다고 말했다. 북괴는 야크기 200여대도 소련에서 받았다. 평온한 서울 거리 그러나 이 평온속에 북괴의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몰랐었다. 북괴는 북에서는 남침준비를 하면서 서울에서는 공산당 지하조직을 통해 끊임없이 사회교란을 회책하고 있었다. 한때 공산당은 국회에도 침투 주한 외국군의 철수를 종용하는 결의문을 내는가 하면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소위 국회 프락치 사건도 일으켰다. 6.25동란 전해인 1949년 6월 29일 한국에 주둔한 미군이 모두 철수해버렸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 에치슨은 6.25가 발발하던 해 1월 미국의 극동 방어선 문제를 이렇게 발표했다. 즉 이지도에서 처럼 일본과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내에 한국과 대만은 미국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이었다. 긴박한 정세속에 우리 국방력은 어떠했는가. 여기 서해안을 낀 38선 인근 옹진반도의 향토방위대의 모습이 당시 국방력을 잘 확인 해준다. 무기가 없어 이렇게 죽창이나마 들고 향토방위에 나섰던 주민들, 38선을 지키던 우리의 국군들, 미군은 철수해버렸고 정부의 계속된 무기 원조요청도 응답없는 메아리에 그쳤다. 달구지로 보급품을 나르던 국군장병, 일선 고지로 보급됐던 주먹밥은 매서운 추위로 해독불가(14분25초). 국군 부대를 찾은 연예인들이다. 당시 국군의 병력은 10만명으로 북괴의 절반이었고 장비는 장갑차 27대 박격포 900여문 밖에 없었다. 공중은 L4, L5, T6등 연습용 경비행기 22대 뿐이었다. 6.25 발발 한달전 남한은 제 2대 국회의원선거에 전 국민이 들떠있었고 남침 준비를 마친 북괴는 6월 7일 남북 총선거를 제의했고 조만식 선생과 남로당의 김삼용 이주하를 교환하자는 등 위장평화공세를 펴왔다. 정부는 설마 북괴가 남침해오겠느냐는 안심속에 6월 22일에는 군의 비상경계를 해제하고 전병력에 3분의 1에 해당하는 장병들에게 15일간의 모내기 돕기 휴가를 주어 고향에 내려보냈다. 6월에 접어들어 북괴는 기동훈련을 가장해서 38선 지역으로 전병력을 이동시켰다. 북한 농촌도 완전 전투태세로 바뀌었다. 38선상의 북괴군은 6월 23일까지 부대배치를 완료했다. 6월 24일은 토요일 6월 25일은 일요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