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지상군이 부산에 상륙한것은 개전 닷새후인 7월 1일이었다. 공산군과 처음으로 싸운것은 미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기동부대였다. 스미스 부대는 7월 4일 오산에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빈약한 무장과 퇴군 병력으로 북괴의 정규군의 화력을 당할수는 없었다. 북괴군의 전쟁준비 정보에 어두웠던 결과였다. 그동안 국군은 평택, 진천, 음성 등지에서 혈전을 벌였지만 대세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6.25직후 한국 공군이 미군으로부터 수령한 F-51 무스탕 전투기에 해독불가(22분48초) 이전투에서 이근철 비행단장이 전사했다. 한편 도쿄의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됐고 7월 12일 유엔의 급파를 의거했다. 대전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후퇴하는 국군도 그때그때 재집결 전선에 투입되곤 했다. 7월에 접어들며 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피난길은 더욱 고달퍼졌다. 금강 방위선도 무너지려 하자 대전으로 옮겼던 정부는 대구로 내려갔다. 대전도 곧 전쟁터가 된다는 소문으로 피난민들은 대전역으로 몰려들었다. 미 24기갑 사단과 대전 전투, 딘 소장이 이끄는 24사단은 대전 사수를 외치며 7월 19일과 20일 이틀동안 대전에서 시가전까지 벌이며 최후까지 버텨나갔다. 그러나 북괴는 3개사단 병력으로 대전을 포위 1개사단의 미군을 조여들어갔다. 딘 소장은 스스로 바주카포로 적 탱크를 부수는등 분투했으나 20일 새벽 5시 대전은 적의 손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