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어지러운 정국하에 국민은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벅찼다. 지리적으로 남한은 농업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결과 남한은 비료공장 해독불가(4분44초). 그저 약간의 경공업이 있었을 뿐이었고 전력마저 북쪽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나마 북한은 1948년 5월 송전을 중단하고 산업시설을 마비시켰다. 1948년 1월 유엔 총회 결의로 유엔 임시 한국 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왔다. 그러나 소련군 사령관은 이들이 북한땅에 들어가는 것을 거절했다. 유엔은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땅에서만 선거를 실시 정부를 세우기로 했다. 이때 김구 선생은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을 했지만은 성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5.10 민주 선거 남한에서만 198명의 국회의원을 뽑고 인구비례에 따라 북한지역에 대한 3분의 1에 의석은 남겨놨다. 5월 31일 개헌된 제헌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7월 20일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를 선출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서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베풀어졌고 그해 12월 유엔은 대한민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정부수립 3개월만에 여수에서는 공산집단 40여명이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폭동의 추세를 인근 순천까지 넓혀갔다. 이것이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인데 공산 폭동은 제주도와 지리산에서도 이따라 일어났다. 정부수립과 때를 같이해서 국군의 발족도 가세했다. 1948년 9월 국방경비대가 육군으로 해안경비대를 해군으로 개편하고 뒤이어 해병대 공군의 발족으로 비록 장비는 빈약했지만은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