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이 종말을 고하고 우리 한국이 잃었던 자유와 독립을 다시 찾자 2천만 남한시민들은 오직 가로막힌 38선만을 안타까이 여기면서 나날이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4283년 6월 25일 민족수난의 역사는 폭발되었으니 원흉 소련의 앞잡이 북한 공산 도괴는 15만의 군대와 242대의 전차, 168대의 전투기, 2천문의 총 화기를 앞세우고 불의의 침략을 받은 미국군은 불과 4~5개 개단의 병력과 미약한 장비로 홍수와 같이 밀려오는 적의 대 부대를 맞아 악전고투 했으나 터무니없는 병력의 부족으로 우리의 방어진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뜻하지 않은 괴뢰의 침략으로 우리 정부와 국회는 대내 대외로 긴급한 방책을 강구 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어 부득이 대전으로 이전하고 서울 거리는 일시에 소요의 거리로 화했다. 수십만 시민들은 짐을 등에 메고 이리저리 살 길을 찾기에 분주했으며 어버이를 찾는 아이들 아이를 찾는 어버이들 여기에서 인류 사상의 유래 없는 비극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수도 서울을 방위하던 우리 국군은 육탄을 끌어안고 적의 텐트로 달려드는 등 눈물겨운 항쟁을 거듭했으나 남침 3일 후 서울은 놈들의 발에 무참히도 짓밟히고 말았다. 이때 미국 정부는 유엔 안보 긴급회의를 요청해서 전투 중지를 결의하고 북한 괴뢰군에게 38 이북으로 철수 할 것을 명령했으나 괴뢰들이 이에 불응하자 드디어 유엔 총사령관에 맥아더 원수가 취임되어 유엔군은 정의의 전투행동을 개시했다. 그간 수도 서울에 침입한 적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추고 한양 도하 작전을 전개하여 남으로 남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쳤다. 수없이 밀려드는 피난민을 보호해 가며 부득이 우리 국군은 놈들의 좀 먹히는 산하를 뒤에 두고 철수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전으로 모여졌던 정부는 7월 6일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또 다시 대구로 이동했다. 정부가 이동함에 따라서 죽어도 민족의 품 안에서 죽겠다는 피난민의 행렬은 대구로 향하는 차로에 그칠 사이가 없었다. 대전 전투에서 5~6일 동안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대전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이 전투의 영웅 딘 소장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7월 말부터 8월 초에 걸쳐서 아군 전선을 다시 압축하여 낙동강을 최전선으로 북으로는 왜관, 동으로는 포항, 철원은 반구형, 즉 철모형의 진지를 형성했다. 위용을 자랑하던 적 제15사단과 포병연대는 영천으로 침입하여 아군의 방어선을 붕괴하려 했으나 정일권 참모총장과 빈 소장의 후임으로 파견된 미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면밀한 작전지휘 밑에 유엔 공군의 지원을 받은 우리 제2군단 용사들은 이것을 완전히 포위 섬멸했다. 치열한 이 전투에서 갈 바를 모르는 적의 패잔병들은 우리 국군의 위용 앞에 속속 투항해 왔다. 동부전선 포항지구에서는 적 제5사단의 기습으로 일시 포항이 적의 수중으로 들어갔었으나 아군의 면밀한 반격으로 말미암아 이곳을 탈환하고 계속적인 우리 국군의 공격은 동부전선의 적 대부대를 격퇴했다. 이 전투에서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노획했다. 잠시 적의 수중에 들어갔던 포항은 잿더미로 화했다. 통영 진지에 투입한 약 13개 사단을 헤아리는 적의 대 병력은 일시에 낙동강을 도하해서 임시수도 대구를 위협했고 외관에 교두포를 설치한 유엔군 후방에 소수의 병력을 침투시키면서 일대 공격의 준비에 분망했다. 이것을 목격한 유엔군은 이 중대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코자 8월 16일 대 함대로 형성된 B-29 폭격부대가 출동해서 낙동강 서하에 집결한 적의 대군에 집중 폭격을 감행했다. 보라 이 강산을 피로 물들인 놈들의 통쾌한 만로를 여기에서 괴뢰의 흉악한 기도는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지상군과 더불어 우리 공군은 적의 생산 공장, 보급로, 군사시설에 맹폭격을 가해 적의 전력을 마비시키고 적 지상군에 대한 공격으로 우리의 지상군을 엄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유엔의 중공 폭격기들은 교통로, 교량 등의 폭격과 함께 평양, 진남포, 함흥, 성진, 성남 나남지구의 군수공장을 공격해서 거의 전부를 파괴하고 재빠른 제트기와 무스탕 전투기 미영 함대기대는 직접……. 공산 괴뢰는 전 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싸우다가 포로가 된 유엔군 병사들을 강제 데모에 동원시키는 한편 가지가지의 국제 도의에 이탈된 학대와 만행……. 어찌 그 뿐이랴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한 괴뢰들은 노소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강제 동원해서 가지가지의 노역에 종사케 하고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젊은 청소년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정의는 살아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진두지휘 밑에 드디어 4283년 9월 15일 육해공군 합동으로 무제한 총공격은 개시되었다. 이 작전에는 7개국 군함으로 편성 된 260척의 함정이 참가했고 기함에는 맥아더 원수도 친히 지휘를 하고 유엔군 2개 사단과 미 해병 1개 사단 부대를 선두로 하여 대공군의 맹렬한 포격 엄호밑에 후방군이 인천에 상륙을 감행했다. 적을 섬멸하면서 총 돌진을 개시한 것이다. 인천에 상륙한 해병대의 일부는 곧 서울을 향해서 진격을 가하고 일부는 남으로 향해서 중간 지대의 적군을 소탕하면서 북상하는 지상군과 합류했다. 아 감격의 9월 28일 반격이 개시 된지 2주일 만에 수도 서울을 탈환해서 폼도 당당한 아군의 입성식은 그간 잠시나마 적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수많은 시민들의 눈물어린 환호 밑에 거행되고 중앙청 하늘높이 태극기는 계양됐던 것이다.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해서 갈팡질팡 북으로 북으로 패소하는 적을 추격하고 기타 동부, 중부 전선의 북상부대도 도처에서 적의 패잔병을 쳐부수면서 쾌속도로 진격해서 10월 초에는 민족의 원한이 사무친 38선에 이르렀다. 이때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방송을 통해서 괴뢰군 총사령관에게 적대행위를 정지하라고 항복을 권고했으나 침략의 야욕에 불타는 적이 이에 불응하자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는 총 진격을 개시하고 북진의 북진을 계속했다. 정의의 진격이 있는 곳에 동포의 환호성은 드높아 가는 곳마다 연도에 늘어선 환영의 군중들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리하여 수도 사단은 3사단과 병행해서 인제를 거쳐 10월 10일 감격적인 시민들의 환영 위에 원산에 진격했다. 또한 계속적인 아군의 진격은 괴뢰정권의 아성 평양을 목전에 두고 용기백배했다. 드디어 10월 19일 용맹한 우리 국군은 숙망의 평양 진주를 하고 오랫동안 신음하던 북한의 도시와 농촌을 공산치하에서 구출했다. 전란을 피해서 각처에 흩어졌던 북한 동포들은 아군의 진두와 더불어 자유가 깃들인 평양으로……. 아군은 이제 침략자에게 최후의 철퇴를 내리고자 북한 전역으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고 있다. 진군 총 진군 백두 선봉과 압록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조국과 민족의 수호하려는 우리 국군 용사들 그리고 이역만리 낯선 산야에서 오직 하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고귀한 생명을 바치려는 유엔 각국 장병들 그들의 성스러운 희생 앞에 뉘라서 감히 항거 할 수 있으랴. 아군의 선발대는 이미 대산지대에 이르고 두만강에 피 묻은 칼을 씻었다. 그러나 이때 한만 국경에 집결하여 침입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5~60만의 중공군이 불법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고 아군과 유엔군의 북한 철수 유엔군이 철수 하는 곳마다 그 뒤를 이어서 60만 이상의 동포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향했다. 또한 미 제7사단의 17연대와 국군부대도 철수를 개시해서 북상했던 수도 사단과 흥남에서 상봉하여 해상 철수작전은 해군권의 완전한 장악 밑에 성공시켰다. 한편 작전상 무저항 철수를 감행한 아군은 4284년 1월 3일 적이 서울 경부 땅 의정부에 침입하자 1월 4일 부득이 정부 각 기관을 부산으로 철수 했고 이에 앞서 일반 시민들도 전부 남으로 피난케 했다. 엄동설한 통을 무릅쓰고 낮에 밤을 이어 한강의 얼음판을 걷는 비참한 피난민의 행렬 그들의 가슴속에는 천인공노할 붉은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과 격분이 한 없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적의 대 공세가 개시된 이래 인해전술로 말미암은 국군과 유엔군의 피해도 많았으나 적의 피해는 무려 10배 이상에 달했다. 그러나 37도선에서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한 아군은 1월 15일을 기해서 재차 눈부신 반격전을 전개했다. 연이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끝에 서부전선으로부터 진격한 아군 국군부대는 3월 14일 밤 서울을 재탈환했다. 중공 오랑캐가 짓밟고 간 서울의 거리는 참담했으며 폐허화 된 중앙청의 하늘에는 눈물어린 태극기가 다시금 계양되었다. 중공 오랑캐는 홍수같이 밀려왔으나 아군의 우세한 공군력과 정밀한 화기 앞에는 대적이 되지 못하고 한낮 파리의 죽음으로써 사라졌다. 이렇게 무력전과 외교전에서 큰 실패를 본 공산 침략자들은 전란 제1주년을 계기로 해서 유엔 소련대표 말리크로 하여금 정전안을 주창케 했다. 이리하여 전란 제2년 초기인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은 개시됐으나 처음부터 파란중첩을 거듭했고 아방의 누차에 걸친 양보에도 불구하고 종말을 짓지는 못했었다. 한편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시작된 뜻하지 않은 휴전회담은 국민들로 하여금 울분을 자아내게 했으며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전반대 총 궐기대회는 북진통일에 대한 신념을 더욱 공고히 했다. 치열한 철의 삼각지 방어에 뒤 이어서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에도 전투는 회담과는 별도로 의연 계속 됐고 아방에서는 적의 침투를 방지하고 분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적은 전선 산악지대의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겉으로 정전을 표방하면서 계속적으로 막대한 병력과 군수품을 장비하고 특히 수많은 포병을 전투에 투입했다. 그러나 무모한 적의 공격은 아군의 위력 앞에 좌절되고 막대한 손실과 또한 수많은 포항병을 속출시켰다. 전투에서 생포한 적의 포로들은 우리의 따뜻한 온정과 후대에 만족했으며 그들은 공산치하에 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며 살길은 오직 자유대한의 품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판문점에서는 우리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4286년 7월 27일 휴전협정은 성립되어 온 국민의 울부짖음을 모르는 냥 문산에서 그 조인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휴전협정의 휴전에 따라서 소환 희망 포로의 교환이 8월 5일에 시작 되서 9월 6일에 완료됐다. 그 결과 7만5천7백9십9명을 북한 측에 송환했고 만2천7백6십 명을 맞아들였다. 그중에는 빈 소장의 얼굴도 볼 수 있었으며 이들을 환영하는 군중들은 곳곳에서 따뜻한 손길로 이들을 맞이해 주었던 것이다. 만 3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우리 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채 전쟁은 끝났다. 자유를 사랑하는 수많은 고귀한 생명이 희생되고 막대한 귀중한 재산을 불살라 버린 채 우리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남북이 갈려 있는 채 그대로 이것을 감수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는 그날까지 6.25의 쓰라림을 다시 상기하고 멸공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여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