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군은 이제 침략자에게 최후의 철퇴를 내리고자 북한 전역으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고 있다. 진군 총 진군 백두 선봉과 압록의 푸른 물을 바라보며 조국과 민족의 수호하려는 우리 국군 용사들 그리고 이역만리 낯선 산야에서 오직 하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고귀한 생명을 바치려는 유엔 각국 장병들 그들의 성스러운 희생 앞에 뉘라서 감히 항거 할 수 있으랴 아군의 선발대는 이미 대산지대에 이르고 두만강에 피 묻은 칼을 씻었다. 그러나 이때 한만 국경에 집결하여 침입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5~60만의 중공군이 불법 개입을 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머금고 아군과 유엔군의 북한 철수 유엔군이 철수 하는 곳마다 그 뒤를 이어서 60만 이상의 동포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향했다. 또한 미 제7사단의 17연대와 국군부대도 철수를 개시해서 북상했던 수도 사단과 흥남에서 상봉하여 해상 철수작전은 해군권의 완전한 장악 밑에 성공시켰다. 한편 작전상 무저항 철수를 감행한 아군은 4284년 1월 3일 적이 서울 경부 땅 의정부에 침입하자 1월 4일 부득이 정부 각 기관을 부산으로 철수 했고 이에 앞서 일반 시민들도 전부 남으로 피난케 했다. 엄동설한 통을 무릅쓰고 낮에 밤을 이어 한강의 얼음판을 걷는 비참한 피난민의 행렬 그들의 가슴속에는 천인공노할 붉은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과 격분이 한 없이 솟아올랐던 것이다. 적의 대 공세가 개시된 이래 인해전술로 말미암은 국군과 유엔군의 피해도 많았으나 적의 피해는 무려 10배 이상에 달했다. 그러나 37도선에서 철통같은 방어선을 구축한 아군은 1월 15일을 기해서 재차 눈부신 반격전을 전개했다. 연이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끝에 서부전선으로부터 진격한 아군 국군부대는 3월 14일 밤 서울을 재탈환했다. 중공 오랑캐가 짓밟고 간 서울의 거리는 참담했으며 폐허화 된 중앙청의 하늘에는 눈물어린 태극기가 다시금 계양되었다. 중공 오랑캐는 홍수같이 밀려왔으나 아군의 우세한 공군력과 정밀한 화기 앞에는 대적이 되지 못하고 한낮 파리의 죽음으로써 사라졌다. 이렇게 무력전과 외교전에서 큰 실패를 본 공산 침략자들은 전란 제1주년을 계기로 해서 유엔 소련대표 말리크로 하여금 정전안을 주창케 했다. 이리하여 전란 제2년 초기인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은 개시됐으나 처음부터 파란중첩을 거듭했고 아방의 누차에 걸친 양보에도 불구하고 종말을 짓지는 못했었다. 한편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시작된 뜻하지 않은 휴전회담은 국민들로 하여금 울분을 자아내게 했으며 전국 방방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전반대 총 궐기대회는 북진통일에 대한 신념을 더욱 공고히 했다. 치열한 철의 삼각지 방어에 뒤 이어서 휴전회담이 개시된 후에도 전투는 회담과는 별도로 의연 계속 됐고 아방에서는 적의 침투를 방지하고 분쇄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적은 전선 산악지대의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겉으로 정전을 표방하면서 계속적으로 막대한 병력과 군수품을 장비하고 특히 수많은 포병을 전투에 투입했다. 그러나 무모한 적의 공격은 아군의 위력 앞에 좌절되고 막대한 손실과 또한 수많은 포항병을 속출시켰다. 전투에서 생포한 적의 포로들은 우리의 따뜻한 온정과 후대에 만족했으며 그들은 공산치하에 돌아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뿐이며 살길은 오직 자유대한의 품인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었다. 4285년 6월 18일 새벽 5시를 기해서 반공 대공포로 석방이라는 위대한 사실이 이 대통령 각하의 명령 하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이리하여 대구, 영천, 거제도, 마산, 광주, 논산, 부평 등지의 각 포로수용소에서 7천여 명의 반공 포로들이 다시 철망을 벗어나 자유의 품에 안겨 조국과 민족 앞에 멸공을 맹소했다. 그러나 판문점에서는 우리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4286년 7월 27일 휴전협정은 성립되어 온 국민의 울부짖음을 모르는 냥 문산에서 그 조인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휴전협정의 휴전에 따라서 소송 희망 포로의 교환이 8월 5일에 시작 되서 9월 6일에 완료됐다. 그 결과 75,799명을 북한 측에 송환했고 12,760명을 맞아들였다. 그중에는 빈 소장의 얼굴도 볼 수 있었으며 이들을 환영하는 군중들은 곳곳에서 따뜻한 손길로 이들을 맞이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이루는 그날까지 6.25의 쓰라림을 다시 상기하고 멸공의 결의를 더욱 굳게 하여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