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겨레는 기나긴 5천년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말은 있으되 우리의 글이 없던 옛날이 있었습니다. 남달리 생활명사가 풍부하고 산천을 노래할 줄 아는 우리네 조상들은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글월에 옮기는데 남의 나라 글로 짓고, 이를 노래하는데도 남의 글로만 읊어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겨레가 오늘날 문화민족임을 자처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근거로서는 우리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 즉 한글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한글이 나오게 된 것은 이조 때 임금인 세종대왕께서 우리의 말이 중국문자인 한자로 표시되는 어려움 때문에 민족문화가 크게 침해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신 끝에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깨달아야 할 사실은 세종대왕께서는 남의 글자인 한문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것에만 그치지 않고 중국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사대주의 사상이 겨레의 자주성을 침해하기 때문에 우리의 발음에 맞고 배우기 쉬운 한글을 창제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께서는 한글을 쓰는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친히 월인천강지곡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한문이 배우기 어렵고 힘들었던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그리고 한문을 숭상하고 우리글을 업신여긴 타성 때문에 우리의 촌락에는 아직도 문맹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은 늦게나마 우리 한글이 쓰기 쉽고 배우기 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 자라나는 새싹들도 남에게 들릴세라 조상들이 물려준 글공부에 손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글을 쓰기 시작한지 500여 년 동안, 한글의 역사는 그대로 수난의 길이었습니다. 한때 연산군은 한글을 멸시해서 한글사용금지령까지 내리는 포악한 비극을 자아냈으나 이조 말에 들어서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성경을 한글로 옮기는 데서부터 크게 대중화됐으며, 최근세에 와서는 주시경 선생이 한글의 과학적인 정리를 함으로써 한글의 진가가 드러나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글을 지키고 한글 표식에 일생을 바쳐온 최현배 선생의 표고담을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최현배 : 매년 10월 1일, (안 들림) 조선어학회 회원 33인을 검거하여서 형무소에 가뒀습니다. 이때에 큰사전 원고도 (안 들림). 우리들은 3년 동안 갖은 옥고를 겪는 중에 이윤재, 한징 두 분이 옥중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오기는 하였습니다만 나오고 보니까 큰사전 원고가 간곳이 없어서 (안 들림) 찾은 결과, 서울역 앞 문서회사 창고에서 겨우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것을 정리해서 큰사전을 시작한지 28년 만에 완성했습니다.” 이렇게 지키고 자라온 우리의 한글이건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한글을 업신여기는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로도 멋있고 뜻있는 표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보시는 것처럼 외국말로만 된 간판과 외국 문자로 만든 간판을 볼 때, 우리는 그렇게 표시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외래어를 써야만 장사가 잘된다고는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심지어 어린이 상대 과자나 사탕의 이름까지도 대부분 외국말이나 애들이 읽지 못할 외국어로만 써있는 것은 결코 우리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겐 이로운 일은 아닌가봅니다. 우리는 우리 겨레에 빛나는 문화적 유산인 한글을 고이 간직하고 또 그것을 만드신 세종임금의 위업을 영원히 추앙하기 위해서 해마다 제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문화민족의 글과 나란히 이제 우리 한글도 과학적인 조직을 가지고 기계화돼서 과학문명에 발맞춰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조국근대화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말과 우리의 글은 근대화작업에 있어서 의사소통에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또한 그 뒷받침으로써의 보람을 지니고 있음을 명심하고 우리말과 우리글의 참된 가치를 재인식할 때가 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 고유의 민족문화를 소중히 여겨서 우리는 결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우리의 조국을 재건해나갈 때 우리에게는 비로소 부유하고 힘 있는 생활이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