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아가라, 물의 천둥이라는 뜻이다. 미국이 세워지기 전 이곳의 원래 주인이던 세네카 인디언들이 붙인 이름 나이아가라. 세네카족의 고유 언어가 오랜만에 가을 축제의 시작 기도로 조상들의 들판에 울렸다. 오랜 박해의 세월을 지나 미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그나마 남겨진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려 애를 쓰고 있다. 세네카 인디언들과 우리악기 편경이 500년의 시간, 지구 반 바퀴의 거리를 건너 새 즈믄 해 깊은 인연으로 만난다. 그 만남의 지평은 무엇인가? 말은 있으되 글자가 없는 온 세상의 백성들을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 새 즈믄 해 그의 꿈이 이루어진다. 우리글의 이름은 한글이다. 1443년 세종 자신이 붙인 이름은 ‘훈민정음’, 왜 세종은 28자의 글자를 만들고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자가 아닌 바른 소리, ‘훈민정음’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일까? 세종이 살았던 500년 전은 글자라 하면 한자만이 유일하며 다른 글자를 감히 생각하기 어려웠던 시대였다. 한자는 사물과 관념의 의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뜻글자이다. 사물과 관념의 수만큼 그 글자의 수는 수만, 수십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해례본 서문에 ‘지금 정음을 만듦에, 애초 뜻을 쓰고 찾은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소리에 의하여 그 이치를 다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세종은 소리의 이치를 밝히려 하였던 것이다. 500여 년 전 표의문자의 관념에서 벗어나 소리만으로 글자를 기록한다는 것은 엄청난 사고의 전환이자 깊고 원대한 꿈의 시작이다. 세종은 1397년 음력 4월 10일, 현재 통의동 137번지에서 정안군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출중한 군주의 자질을 보인 세종은 국가의 기틀을 잡고자 애썼던 아버지 태종의 선택으로 1418년 9월,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제 백성들은 21살의 젊고 명민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을 깊이 사랑하는 성군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천체와 기상관측 기기를 제작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통해 민생은 점차 안정됐다. 이는 세종이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두뇌의 소유자로 그 자신 탁월한 학자, 과학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문화의 기본이 되는 음악, 즉 아악을 정리했다. 음악적 체계의 정리가 범인들은 손대기 어려운 고도의 작업이라는 것은 정평한 일이다. 이론과 악기, 악보, 악제 등을 일관된 체계로 완성시키는 작업을 박연의 도움을 받으며 세종 자신이 주도했다. “세종대왕께서는 저희가 생각하기로는 그 음악의 아주 천재였다고 생각이 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그 조선조 초기, 예를 들면 고려 말 서부터 조선 초기까지에는 그 음악이 상당히 정리가 되지 않고 상당히 그 고려 때의 음악을 갖다가 그대로 습용해서 쓰는 그런 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세종대왕께서 음악에 그야말로 천재였었기 때문에 그 음악을 정리하시었습니다. 음악을 정리하시게 된 동기를 생각해본다고 그러면 세종대왕께서 그 당시에 본인도 음악에 밝으실 뿐만 아니라 박연과 같은 아주 그 훌륭한 음악가, 또 맹사성과 같은 훌륭한 음악가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나왔기 때문에…….” 세종은 이렇게 음악의 천재였다. 그가 아악 표준음 마련을 위해 제작한 편경, 편경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세종의 천부적인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 일화가 세종실록에 전하고 있다. 세종 9년 5월, 편경의 제작을 끝내고 대왕을 모신 자리에서 타경의 시범을 가졌다. “중국의 편경은 정돈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지금 그 소리가 맑고 그 음을 비교해보니 조화가 옳게 잘 되어 내가 매우 기쁘다.” 박연은 그 말씀에 더불어 큰 기쁨을 느꼈다. “인종” “이측” 하지만 곧이어 왕의 말씀이 이어졌다. “그런데 이측은 일미의 소리가 높은 것은 무슨 연유인가?” 세종의 밝은 귀가 박연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섬세한 음의 차이를 잡아낸 것이다. 일순 황망해진 박연은 한달음에 달려가 이측음 일미를 살펴보고는 송구스런 말씀을 올렸다. “간음한 먹이 아직 조금 남아있으니 다 갈지 못한 때문인 듯합니다.” 그 후 다시 갈고 닦아서 시험한 바 제대로 소리가 나왔다고 5월 15일조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이 추적해낸 음의 차이는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국내에서 유일한 편경 제작소의 도움을 받아 그 음의 차이를 오실로 스코프로 확인해보는 실험을 하였다. 먼저 제대로 갈고 닦인 편경 음, 860Hz가 기록됐다. 실험을 위해 먹줄이 선명한 덜 갈아놓은 편경 1매, 873Hz 제대로 된 편경 음과 13Hz의 차이를 보였다. 보통사람은 약 30Hz 정도의 음 차이를 구별할 수 있으며 박연이 착각할 만큼 먹줄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종의 음청 능력은 대단히 예민하고 정확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게 완성된 편경은 5음계와 7음계를 아우르는 완벽한 12율계의 확립을 의미한다. 편경을 통해 순정 음이 마련되고 그를 기준으로 철저한 비례관계 속에서 현악기와 관악기의 음정도 자리를 잡게 됐다. 그리고 세종의 원대한 꿈,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기반이 된다. 단단한 이론적 기반, 그리고 최고의 청음력을 갖춘 그의 다음 목표는 사람의 소리였다. 말소리는 어떻게 나오고 들리는가? 그는 인간의 성대가 근본적으로 피리와 다름 아닌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다. 피리가 굵기와 길이, 어떤 구멍을 막고 여느냐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목구멍의 수축과 이완, 혀의 움직임, 입술모양의 변화에 의해 서로 구별되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가, 갸, 가, 차 …….” “그렇다면 같은 구조를 가진 피리가 순정 음에 맞춰 공통의 음을 가진 것처럼 사람들의 말소리에도 공통의 원리가 있는 게 아닐까? 세종의 생각은 그 원리와 소리를 찾아내 체계를 세우고 기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편경이 완성된 때가 1427년, 그로부터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1443년에 이르러 드디어 그는 훈민정음을 완성했다. 훈민정음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렇지 않다는 주장이 인정을 받고 있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왕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드셨다. 이를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 고 하였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이 단독창제임을 밝히고 있으며 집현전 학사들의 경우 당시 책임자였던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를 극렬히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고 성삼문, 신숙주 등은 그 직위와 나이를 고려하면 상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임금을 직접 대면하여 돕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사람들은 우리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반대한 사람들은 최만리, 정창손, 김문 이런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그 학덕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언어학에 대해서 무슨 세종대왕을 도와줄 만한 그런 근거가 없었습니다. 학문적인 근거가……. 그런데 성삼문이나 신숙주 이런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언어학을 도와줄 사람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아주 어린 그런 정5품도 안 되는 그런 낮은 벼슬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대왕 혼자 훈민정음 창제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문자 체계를 만드는 작업의 오랜 연구가 필요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점을 생각하면 훈민정음 창제의 역할을 맡았다고 알려진 젊은 집현전 학사들의 나이는 너무 어리다. 이와 같은 주변 여건도 세종의 단독 창제를 반증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