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짝 마른 대지 위에 애타게 그리던 비가 쏟아진다. 그렇게 일상에 찌들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이민 소식은 갈증을 달래주는 단비와도 같았다. 미국으로 가던 날은 사람들의 얘기 속에 들어있던 잘사는 나라의 모습 뒤에 감추어진 기회를 찾을 생각에 강해져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되풀이 했다. 그렇게 까마득히 보이는 고향땅을 눈 안에 가득 담았다.미국은 다민족 이민국가로 이루어져 있는 나라다. 자유와 평등을 이상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자유경제체제와 민주정치체제를 이룩한 곳이기도 하다. 많은 한국인들도 미래를 위해 자녀를 위해 이곳 미국 땅으로 하나 둘 씩 건너오기 시작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뒤로 하고 택했던 길, 미국 이민이라는 꿈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던가?가뭄이 심하고 농사를 짓기에 황폐한 지대를 살고 있던 농민들은 19세기 중엽 무렵부터 해외로의 이주를 생각하게 됐다. 가까이 접해 있는 중국에 이어 1903년에는 노동력이 필요했던 미국 하와이로의 노동이민도 시작되었다. 때마침 들어와 있던 미국 선교사의 설득력 있는 호소도 한몫을 해 1903년부터 2년의 기간 동안 7천여 명의 한인들이 이름도 낯선 사탕수수농장으로 향했다. 이때 이주했던 노총각을 위해 사진 한 장 만을 보고 하와이로 시집을 간 사진신부도 등장했다. 그렇게 일가를 이루며 하와이에 한민족의 자취를 남기기 시작했다. 1924년 동양인 이민금지 법령이 선포된 후 줄어들었던 미국행은 65년 새로운 이민법이 발표되자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미국시민권자의 초청에 의한 이민과 의사, 간호사, 약사 등 고등교육을 받은 전문직 이민 이 두 가지로 이민의 성격이 나누어진다. 이민자의 대부분이 한국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직장생활을 하던 인테리층이어서 일터에서 맞는 어려움은 더욱 힘들었다. 부지런히 모은 돈을 가지고 소규모 상점을 열기도 했다. 세탁소나 야채가게, 생선가게 등을 차리기 시작한 동포들은 뉴욕시내 야채상점의 80%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미국은 돈 많은 나라일 뿐만 아니라 학문이 발달된 나라였다. 더 많은걸 배워보겠다던 유학길은 가난한 나라 학생이 겪는 설움과 고학에 뒤따르는 피로로 땀과 코피로 얼룩지곤 했다. 60년대 이후 한국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의사, 간호사, 약사, 기술자 등 전문직 중 미국으로 건너간 수도 적지 않았다. 교육을 받고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이민하기 때문에 미국문화를 이해하는데 유리했으며 미국이 필요로 하는 유입이민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들은 한민족의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으로 이국생활을 이겨내곤 했다.그들이 이루어낸 코리아타운, 여러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에 한민족의 도시를 만들어놓은 이곳에는 6500여개의 한인 대상 업체, 총영사관과 한인회 등 8개의 공공기관, 25개의 봉사기관, 600개의 교회, 20개의 사찰 등이 있어 한국의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도시다. 이곳이 한국이 아님은 살아가는 방식에서 느낀다. 생활습관이 다른 여러 민족과 어울려 사는 법은 단일 민족으로 살아왔던 한인에게는 새로운 과제였다. 관습과 문화의 차이로 벌어지는 작은 오해들은 점점 큰 사건을 만들어내고 잊을 수 없는 회오리가 되어 한인들의 삶을 쓸고 갔다. 미국은 자유의 나라이고 평등의 나라이다. 그러나 인간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미국사회에도 인종과 민족에 따른 편견과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제 서로의 상처를 덮어주고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려한다. 이민족을 이해하고 그들의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 그들과 더불어 삶을 영유해야 한다는 공생의식이 필요한 때다. 서로를 잡아주고 밀어주고 함께 기회의 나라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미국사회의 모범적인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긍지와 뿌리를 지키면서 미국사회와의 조화를 이루어나가야 할 것이다.또 다른 삶이 시작됐던 곳, 그곳에서 한국인들의 수는 미국 전역을 통틀어 187만 명이라는 숫자로 불어났다. 한민족의 근대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 미국은 지도에 없는 한국이란 어느 외국 언론인의 표현처럼 이제 동포들의 활약을 먼저 떠올리는 나라가 되었다. 자유를 찾아 풍요를 찾아 떠난 이민자들에게 하나의 이상향이 된 미국, 미국이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1882년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양국가로서 1982년에 수교 100주년을 맞이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교육, 의료, 학술 부문의 시설을 세워 서구의 근대문화를 전파하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했고 미국은 광복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역, 자본도입, 합작투자 등 한국경제 전반에 걸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누적되었던 우리의 대미무역 적자는 80년대 초반부터 흑자로 반전되고 있으며 90년 이후에는 한미무역수지가 대체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 등 개도국 대상의 수입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