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어두운 압제의 땅, 북한을 탈출한 김만철씨 일가족 11명이 마침내 서울에 도착해 자유를 찾았습니다. 따뜻한 남쪽나라 그래서 사람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자유의 나라에 살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참 조국에 안긴 동포들입니다. 청진항을 떠난 지 스물닷새만에 우리 측이 제공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김포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김만철씨는

“오늘을 어떻게 말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따뜻이 대해주고 사랑과 정성을 다 베풀어주시는...”

“크게 좀 말씀해주세요.”

“돌아오는 기쁨을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조선 인민들이 저를 성심성의로 도와주고 또 조국으로 돌아오게끔 해준데 대해서 저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쁩니다.”

김만철씨는 가족들을 소개했습니다.

“제 옆에 앉은 이 사람은 저의 아내입니다. 이름은 최복례라고 합니다. 직업은 청진 단추공장에서 일했습니다. 노동자입니다....”

68살의 장모 허순화씨, 맞처남 최장섭씨는 기관차 기관사였고, 둘째 처남 최평섭씨는 어선 기관사였습니다. 처제 최치선씨, 맞아들 광규씨는 철도공장 노동자, 중학 6학년인 맞딸 광옥양과 둘째딸 광숙양, 중학 3학년인 둘째아들 치일군, 중학 1학년인 막내아들 광호군, 자신은 청진의학대학 병원 의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김만철씨는 탈출동기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제가 탈출하게 된 동기는 공화국 국방부의 실제적으로 인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한 정책인 것이 아니라 정책을 인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해 내려왔지만 실제적으로 인민들이 아주 빈곤하게 사는 이런 정책이기 때문에 저는 이 정책이 머지않아 망하리라고 생각하면서 그 이하에서 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탈출한 것입니다.”

김만철씨 일가족은 칠흑의 밤바다에 탈출선 청진호를 띄워 일본 근해에서 일본어선에 발견돼 쓰루가항에서 선상생활을 했으며 대만을 거쳐 자유대한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저는 실제 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자유스럽게 살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도착하고 막상 생각하고 보니 실제 저로서는 가족이 11명이고 어디로 가야할 지 좀 막연한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조선 그 영사 선생님들이 저희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남조선으로 가야 하겠다는 생각이 저의 머릿속에 지배했습니다.”

막내아들 광호군은 대한민국을 이렇게 배웠다면서

“남쪽에서 거지들만 득실득실 거리고 미제 놈들이 남조선을 착취해가기 때문에 남조선을 통일해야 된다고 통일하자고 그런 교육을 받았습니다.”

“남쪽에 거지들이 득시글 득시글 하고라는 말을 했어요? 그리고 저 미제가 착취를 하기 때문에 남조선을 통일하자고 하는 교육을 받았다. 맞습니까?”

조국으로 불러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밝힌 김만철씨 일가족은 자유의 땅에서 첫 밤을 지낸 뒤 서울시내 관광을 하면서 서울의 발전상을 확인했습니다. 김만철씨 고향은 전라남도 광산군 비아면 비아1리. 일제 말기인 1944년 그의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북으로 이사를 갔으며 고향마을엔 6촌형 김만춘씨를 비롯한 친척들이 살고 있습니다. 김만철씨는 서울에 살고 있는 큰누님과 극적인 상봉을 했습니다.

“김만철 선생이 오셨어요. 동생이십니다. 누님이시죠? 네 동생을 한번 확인을 해보시면..”

“형이 김만술이고 작은 누나가 김재복이고 또 아버지 이름이 김정기씨고 맞소?”

“네, 맞아요.”

“아이고 내동생아...”

“그런데 어머니 저 뭐야”

“김계순이라는 말은 누가 가르쳐줬어?”

“아버지가 가르쳐줬어요.”

맞누님 김재선씨를 만난 김만철씨.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북으로 이사 갈 때 누님은 전라남도 함평으로 출가해서 살았던 까닭에 43년 동안 헤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오랜 세월 이산의 아픔을 달래며 그리워해온 누님과 남동생, 누가 이 만남에 축복을 보내지 않겠으며 누가 이 비극에 공감하지 않겠습니까? 이들 남매의 애달픈 사연이 곧 겨레의 아픔이며 조국의 현실입니다. 이 엄청난 비극이 해소되는 날 남북의 장벽은 허물어지고 평화로운 조국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통행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김만철씨는

“매형이 사망되었을 적에도 가지 못했고 또 작년에 누님이 환갑이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가지 못했습니다. 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통행구역이라는 것이 설정이 돼 있기 때문에 누님이 환갑 때도 못가고 개성 사는 누님이 남편, 그러니까 매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우리 김만철 선생은 가볼 수가 없었답니다. 개성에 계신 누님이 김재복씨였나요?”

“네.”

“김재복씨요?”“그러면 어머니는?”

“나 청진에 같이 있었어요.”

“살았어?”

그밖에 강제노역을 하다 죽음을 당한 맞형과 아버지의 별세소식을 전하면서 만철씨는 남과 북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둘이 어떻게 다르던가요?”

“정말 나는 무시무시한 남조선인줄 알았는데 정말 생지옥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실제 와서 내 어제 짧은 시간에 그 시내를 조금 한 빌딩에 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조국 인민들은 말입니다. 누가 조직하지 않았어도 고생스럽게 살다 넘어온 우리들을 정말 그 따뜻한 손길로써 손 흔들어 주고 말 한마디라도 정말 살뜰히 해주니까 정말 그이상 조국인민들이 따뜻하다는 걸 정말 처음 느꼈습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정말 그 공화국 북반부와 남반부와 대비되는 볼 적에는 거꾸로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북에서 온 김만철씨와 그 가족들이 목숨을 걸고 찾아온 자유의 땅이 진실로 따뜻한 남쪽 나라임을 깨닫도록 최선의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으며 온 겨레가 힘써 화해하고 안정을 이루는 가운데 분단의 비극을 극복하고 민족의 영원한 번영을 기약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