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는 날마다 해가 솟는다. 아침햇살을 받아 출렁대는 푸른 파도소리는 유서깊은 석굴암의 전설을 속삭여준다. 동해의 용이 되어 불법을 지키고 왜적을 물리치겠노라한 신라문무대왕의 유골이 뿌려진 대왕바위에서부터 석굴암의 전설은 비롯된다. 토함산맥을 넘어 동해에 이르면 경주에 양북면 용담마을이 있고 여기에는 문무대왕의 명복을 빌기위해 세워졌다는 감은사 옛 터전이 있다. 지금은 두개의 거대한 석탑만이 서있을 뿐이지만 마을 어귀에 흩어져 있는 큰돌들이 옛절터를 예지하고 있다. 여기는 신라천년의 고도 경주. 토함산 중턱 동해를 굽어보는 자리에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은 8세기 중엽에 인도나 중국의 석불사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인공석굴이다. 석굴 입구에서 주실 끝까지의 길이는 1400cm, 원형주실의 직경은 730cm, 석가모니상을 모신 연와대의 직경은 364cm나 된다. 이 그림은 석굴암의 오른쪽 측면도. 팔부신상이 양쪽 벽에 넷씩 서 있고 입구에 금강역사가 하나씩 버티고 있으며 복도좌우에는 사천왕 상이 서있다. 주실에는 석가모니상과 천상, 보살상이 있고, 십일면관세음보살상이 있고 십대제자상이 있다. 석불의 높이는 870cm, 석가모니상의 높이는 510cm이다. 석굴암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조에 재상 김대성이 포상으로 착공되어 무려 20여년이나 걸린 나머지 혜공왕 10년 서기 774년에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그 정제된 양식이나 치밀한 설계는 신라의 건축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이 아닐 수 없다.



보리수 밑에서 마귀들을 항복받던 옛모습 그대로의 석가모니. 오늘도 중생의 제도를 위해 그 원만하고 장엄한 얼굴에 자비로운 웃음을 띄우고 동해를 지켜보고 있다. 불상의 표정으로써는 최고의 신화. 돌에도 피가 돌게한 이 솜씨들. 석가모니상 바로 왼쪽 벽에 보살상과 보현보살상이 있다. 그리고 석가의 제자가 되기까지에는 흉악한 도적들이였다는 십대나한들의 모습, 그들은 머리깍고 가사장삼을 걸친 비구승들일뿐 아니라 십대제자로 남아있다. 석가모니상 뒤에 보이는 열하나의 얼굴을 가진 십일면관세음보살상, 이는 신라미술의 정수요, 이 석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다. 고요히 감겨진 눈, 다물고 웃음짓는 연꽃입술, 그리고 차원의 얼굴윤곽, 몸 전체를 미끄러지듯 흘러내려간 옷자락과 구슬줄의 아름다움은 우리를 푸근하게 한다. 석가모니상 왼쪽벽 입구에 조각된 제석천상과 문수보살상, 이들은 석가모니의 좌우를 보좌하듯 본전상을 향해 비스듬히 서 있다. 신라인의 예지와 정성으로 바로새겨진 이 순화된 고귀한 불상의 모습. 그 자애로운 모습은 신라의 불상이 아니곤 볼 수 없는 것이다. 주실 상단부에 마련된 열개의 작은 감실에는 유마거사상을 비롯한 여덟개의 보살상이 석가모니의 거룩한 덕을 찬양하듯 본전 둘레를 감싸고 있다.



복도좌우 벽에는 두쌍의 사천왕 상이 각각 조각돼 있으며 이들은 모두 악귀와 망령들을 짓밟고 석가모니를 호위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상이나 보살상들에 자비로움에 비해서 사천왕상이 생동하는 힘찬모습은 이 석굴암의 배치를 한결 더 조화롭고 균형잡히게 했다.



전실 좌우 벽에는 팔부신장이 각각 넷씩 자리잡고 있다. 분노에 찬 금강역사상, 이들 오법신장 앞에는 사악한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금강역사의 억센 힘이 이 신비로운 꿈의 나라 석굴암을 대대로 지켜온 것이다.



온갖 인생의 번뇌를 정화하고 호국의 거룩한 소원을 지켜주는 석굴암. 서라벌의 신앙과 애국정신이 한데 뭉쳐 이루어진 신라예술의 정화 석굴암. 석굴암은 오늘도 조상이 고귀한 뜻과 찬란한 꿈을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