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중앙청건물이 3년3개월간의 개축수리공사를 마치고 새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그 문을 열었습니다. 1926년 10월 일본이 한국식민지 통치의 상징으로 세웠던 중앙청건물은 1982년 3월 정부의 정부청사 이전계획에 따라 56년동안 많은 역사의 영욕을 간직한 채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1983년 5월26일 총무처 장관과 문화공보부 장관이 건물의 관리를 인수인계함으로써 35년동안 정부청사로써의 기능을 끝냈습니다. 이어서 83년 6월15일 개축수리공사 기공식이 있었으며 설계는 종합건축설계사무소가 건축공사는 주식회사 삼부토건이 맡았습니다. 개축수리공사와 병행해 중앙청 울타리 안에 있던 문화공보부 산하 해외공보관과 국립영화제작소, 총무처기록보전소 건물을 철거하는 작업도 착수했습니다. 이 작업은 고궁과 박물관을 조화시켜 경복궁 일원을 민족문화 창조의 요람으로 국민들이 즐겨찾는 문화공원으로써의 구실을 하기위한 것으로 모든 공사는 차질없이 진행됐습니다. 중앙청 보일러실의 해체작업입니다. 본관내부공사에 앞서 이루어진 이 공사는 보일러실을 지하에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모든 공사에 앞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이 식민통치 이후, 조선총독부 청사로 사용했던 이 중앙청 건물은 위에서 보았을 때 날일자 모양으로 설계돼 건물 중앙좌우에 공관이 있었는데 이번 개축공사를 통해 이 공간좌우를 대형 전시공간으로 증축해서 일본을 상징하는 날일자 모양을 완전히 없애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중앙청 건물을 고치고 다듬는 것은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새롭게 비약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부지면적 3만4백여평 연건평 만8천여평에 전시면적 2896평을 갖추게 된 이 건물은 구 박물관과 비교해서 약 세배 전시면적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수리공사는 중앙청 중앙홀은 원형을 그대로 살렸으며 그밖의 공간은 기본골조를 살리면서 벽을 헐고 보수하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중앙청 동편광장은 지하차고로 만들어졌습니다. 주변경관의 미화를 위해 차고를 지하에 설치하는 이 공사는 특히 방수처리에 철저를 기했으며 200여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습니다. 한편 동편광장에는 종로에 있던 보신각종을 옮겨놓기 위해 종각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보신각 종은 종심에 균열이 가 더이상 타종할 수 없기 때문에 서울특별시가 이곳 박물관에 이전, 보전도록 한 것입니다. 종전에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던 앞마당도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광화문에서 정문에 이르는 길은 화강암으로 된 박석을 깔아 중후한 느낌을 나타냈으며 그밖에 부분은 색깔있는 보도블럭을 배열해서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했습니다. 또한 주변조경을 위해 일제때부터 심어놓은 나무들을 모두 새로운 수종으로 바꾸었는데 50년생 소나무 140여그루를 심었으며 그밖에 느티나무와 청단풍, 느릅나무 등 160여그루를 심어 한국적 인상이 풍기도록 했습니다. 보일러실은 박물관 내에 유물을 보존, 관리하는데 충분하도록 현대식 시설로 갖추었는데 난방능력이 20톤, 냉방능력이 1780냉동톤이며 두대의 발전기는 1300키로와트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유물창고인 소장실은 유물의 안전관리를 위해 지하에 설비했는데 지상에 소형창고를 포함해 3775평방미터에 달합니다. 소장품의 도난방지를 위해 TV카메라를 설치해서 집중중앙식으로 감시할 수 있게 했습니다. 또한 문화재의 화재예방을 위해 방제센터를 설치, 운영도록 했으며 화제시에는 즉시 전시실 문이 자동으로 닫히도록 하는 등 소장품들의 안전관리에 철저를 기했습니다. 박물관 계수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서 이사준비도 서둘렀습니다. 포장에 앞서 모든 소장품은 카드에 정리했으며 한점의 문화재라도 파손되는 일이 없도록 소중하게 다루어지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박물관이 세워진 것은 1908년. 거의 80년의 역사를 헤아립니다. 이 기간동안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박물관은 크게 팽창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왕가 박물관이 세워진 이래로 여섯번이나 박물관 건물을 옮겨야했고 현박물관의 전신인 총독부 박물관을 비롯해서 경주, 부여, 공주의 박물관들이 우리손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 문을 열게 된 것도 우리 박물관이 지나온 어두운 단면이기도 합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 손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가꿔온지도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사회가 겪었던 혼란과 격동으로 유물의 안전관리조차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제 소장유물 10만점을 헤아리는 거대한 박물관으로 성장했습니다. 구 박물관에서 새 박물관으로 이전해온 유물들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져 미리 준비된 전시실로 옮겨졌습니다. 조상들의 숨결이 담겨있는 문화재이기 때문에 어느것하나 소홀함 없이 정성껏 안치됐습니다. 새 박물관의 전시면적이 세배 가까이 늘어나게 되고 전시내용도 종내의 한국문화재 중심에서 벗어나 주변국가들의 유물을 함께 전시함에 따라 중국, 일본 등 외국 박물관에서 대여받은 유물과 더불어 그동안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유물들을 과학적으로 보존처리해서 새로운 모습으로 선보이는데도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공간은 크게 주층인 2층과 3층, 4층의 3개 층으로 구성했습니다. 주층인 2층에는 박물관 역활의 핵심이 되는 선사실, 원삼국실, 고구려실, 백제실, 신라실, 통일신라실, 불교조각실을 배치했으며 두개의 기획전시실을 마련했습니다. 전시내용은 선사실에서 한반도의 역사가 삼십만년 전까지 올라가는 물증들을 보여주며 그밖에 고구려, 백제, 신라실에서는 당대의 화려했던 문화의 일면을 한눈에 볼수있습니다. 3층에는 금속공예실, 고려자기실, 분청사기, 조선사기실을 배치했습니다. 금속공예실에서는 최근 박물관 보전과학실에서 복원한 감은사 사리함과 함께 화려한 공예품과 가구 장식등이 전시돼 있으며 고려자기실과 조선자기실에는 종전에 박물관에서 전시된 대부분의 명품들이 다시 진열돼 있고 특히 조선자기실 코너에는 박병래 선생과 이용근 선생의 귀중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4층은 한국문화와 밀접한 문화교류를 가졌던 주변문화 즉, 중앙아시아실, 낙랑실, 신안실, 중국실, 일본실을 배치했습니다. 4층에는 전시공간의 특수성을 따라 회화실과 불화실을 두고 따로 역사실을 마련해서 우리 민족이 이룩한 정신문화의 바탕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서역의 이색적인 유물들은 중앙박물관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명품들입니다. 1986년 8월21일 전두환 대통령이 영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개관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새 국립중앙 박물관의 이전, 개관은 제5 공화국의 국정지표에 하나인 문화창달 의지를 단적으로 구체화한 것입니다. 새로 개관된 국립중앙 박물관은 역사의 한이 서린 치욕의 건물이지만 민족사의 수난을 극복하고 우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좋은 본보기이며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살아있는 종합적인 사회 교육장으로써 그 역활을 다해갈 것입니다. 새 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근세 200년간의 한국과 일본의 문화교류전인 조선통신사전이 특별전시로 열렸습니다. 특히 조선통신사 행렬도는 한국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된 과정이 잘 묘사돼 있어 흥미를 끌었습니다. 또한 조선초기 서화 특별전도 열려 일본이 갖고 있는 한국회화의 걸작품 몽유도원도가 고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이 그림은 1447년 안견이 세종대왕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그린 산수화로써 조선초기 회화자료로써 높은 가치를 지닌것입니다. 한국문화의 전통과 특징을 입체적으로 전해놓은 국립중앙박물관은 명실상부한 역사박물관으로써 민족문화보존과 국민정신 창조의 요람으로써 또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민교육장으로써 그 구실을 다해갈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