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사원의 변형은 불교의 발생력인 인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석불사원의 조성도 중국을 비롯한 불교제국에 퍼지게 됐고 마침내 한반도에도 유입됐다. 인도나 중국의 석불사원은 자연암벽에 굴을 파고 굴 벽면에 탈이나 불상을 보좌하여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석불은 아주 단단한 화강암층으로 해서 굴은 파되 석불은 따로 조성하여 봉안하던가 인공으로 석불을 구축하고 내부공간을 불상으로 장식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통일신라기에 들어 불교가 새로운 융성시대를 맞이함에 오랫동안 쌓아온 신앙의 깊이와 세련된 기술을 구사하여 8세기 중엽에는 인공석불로써는 가장 우수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낳게 됐다.



신라의 옛고도 서라벌에서 제일 먼저 새벽을 맞이하는 토함산. 구름위에 높이를 다투는 산우리들을 손아래 어루만지며 그 밑으로 멀리 동해의 수평선을 내려다보는 곳에 자리잡은 석굴암은 청정덕개 석가정토를 이룩한 부처의 세계인 속리산이다. 5세기 역류한 수혼이 서린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토함산을 숨이 닿는 것처럼 해도 여래를 찬양하는 여러보살과 신장들을 배치하여 석가정토의 변천을 나타냈으니 하늘의 세계를 토함산에 옮겨 놓은것으로 더욱 웅대하고 신비한 감격에 넘치게 한다. 원래 토함산은 불교가 수입되기 전부터 신라5악의 하나로 신라인들에게 명산으로 추앙받았던 산이다. 선정에 들었던 여래는 오른손을 고요히 무릎위로 스치며 잠을 건드려 악의 항복을 받고 정토세계를 이룩한 석가팔상 중에 가장 감격적인 찰나의 모습이다. 석굴암의 창건은 신라 경덕왕 10년 서기751년 당시의 재상 김대성에 발언에 의해 이루어졌다.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 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방면에 걸쳐 신라 왕조 중 최고의 융성이 이룩됐던 시기였다.



석굴암의 내부구조를 조감해보면 전실에서 주실까지의 길이는 48척, 좌우의 길이는 24척으로 이룩됐다. 석실 주변에는 여러상을 조각한 판석을 연립시켰는데 전실좌우 양벽에는 팔부신중을, 뒤로 입구 양쪽에 금강역사상을 뒤로 양쪽에는 사천왕상을 조성했고, 주실 입구에는 두개의 팔각석주를 세웠다. 주실에 들어서면 두 천과 두 보살상과 열개의 십대제자상, 보존불 바로 뒤에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을 세웠다. 본전대좌의 위치는 주실 중심점에서 세척 떨어진 안쪽에 두었다. 주변 위쪽으로는 양쪽 다섯개씩의 열개의 감실을 만들어 공 양상을 안치했다. 주실의 천정은 궁림으로 조성했는데 천정의 돌은 5단으로 쌓아 위로 갈수록 작게하고 주목장돌을 달았다. 천정 정상중앙에는 연화무늬가 새겨진 천개석을 박았다. 본존불을 안치한 대좌의 높이는 6척이며 본존불의 높이는 12척, 본존불과 천정 공간의 높이는 12척으로 바닥에서 연화석까지의 높이는 총30척이다. 석불의 바닥밑으로는 항상 샘물이 흐르게 해서 토함산의 샘으로 해서 생기는 습기를 채 덜 없게했다. 석불본존이 정면으로 응시하고 계신 곳은 바로 동해구의 문무대왕암이다. 문무대왕은 반도평화의 영주이며 죽어서라도 호국대령이 되어 동해구에 출몰하는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을 세워 서거된 뒤의 방식에 의해 화장되어 이곳 해상암두에 산곡해했다. 신라인들은 문무대왕의 유곡성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석불의 전정과 그 방향에 깊은 배려를 했던 것이다. 대왕암이 바라보고 있는 대정천석이 화려하게 자리잡은 감은사는 그의 아들 신문왕이 부왕의 성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금당 밑에 구멍을 뚫어 동해수와 함께 호국령이 된 대왕의 넋이 드나들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대왕을 위한 용단이다. 문무대왕에 대한 후왕의 충정은 거의 1세기가 지난 경덕왕대에까지 이어져 석굴암과 같은 찬란한 민족문화의 금자탑을 낳는 계기가 됐다. 동해구의 문무대왕암에서 토함산의 석굴암을 이으면 춘분과 추분에 해가 뜨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한다.



먼저 전실에 들어서면 좌우 석벽에 네구씩의 상이 들어 있다. 좌측 석벽에는 아수라, 긴나라, 야차, 용의 상이 있는데 이들은 부처님의 권석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신중이다. 원래 팔부신중은 인도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써 결계로 말미암아 불사를 옹호하는 신장이 됐으며 많은 다리에 괴테는 그 신장들의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적 표현이다. 우측의 상들은 가루라, 건달바, 천, 마후라가 순으로 서 있다. 이런 팔부신중들은 사천왕과 더불어 석굴암 초실에 번좌를 비롯하여 십일면관세음보살,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보살들, 십대제자들을 옹호, 호위하는 뜻에서 그 입구, 전실에 모셔졌다. 기대 입구 양쪽에는 매우 용맹스럽고 역동적인 두개의 상이 조성됐는데 숨은 신장인 금강역사상이다. 침범할 수 없는 표정이면서도 조금도 악의가 없는 얼굴, 전신에 생동하는 힘, 날쌘 동작의 순간을 포착한 끝에 무법자, 사악한 자를 물리치는 무적의 위력이 이 역사의 근육과 면모와 자세에 드러나있다. 머리뒤의 두건은 이 역사가 단순히 힘쎈 사람이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고루갖춘 사람임을 표시한다. 이 역사와 신장들은 오직 하나의 위대한 마음을 지닌 권존이신 부처님의 힘의 현현에 불과한 것이다.



뒤로 양쪽에는 두곳씩 사천왕상이 조각돼 있다. 오른쪽 첫째상이 동방지국천, 이는 나라를 다스리고 또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뜻이다. 이제 막 악귀의 승복을 받고 칼을 거둬들인 자세는 조금이라도 악한 마음을 지니고는 이 지역을 통과할 수 없음을 무언 중에 시위하고 있다. 그 옆이 북방다문천 많이 듣는다는 뜻을 지니며 칼 대신 보탑을 오른손에 들고 있다. 사천왕 중에서 북방을 다스리도록 명령을 받고 거기에서 부처님의 법응을 항상 지키며 부처님 술법을 많이 듣는다는 것이 바로 다문천이다. 왼쪽에는 남방증장천과 서방광목천이 조각돼있다. 자꾸 확대된다는 뜻을 지닌 남방증창천은 수미산의 남쪽 중턱에 머물러 있으면서 남방에 있는 여러 귀신들을 조복케하여 권속으로 삼고 불법을 지키도록 되어 있는 존재이다. 사실적 조법으로 표현된 견갑을 두른 긴다리에 당당한 위풍과 악귀의 당혹한 표정은 대대적으로 벽면에 역동하고 있다. 서방광목천은 큰 눈을 가졌다는 뜻을 지닌 사방천의 서방수호신이다. 이들 사천왕은 사악에 대해서는 가혹한 징벌을 평화로운 것에 대해서는 영원한 다보를 종교에 대한 무한한 보장을 약속하며 천상계의 길목에서 우리 중생들에게 바른길을 인도하고 있다.



주실입구에 두 팔각판은 그 안이 보궁임을 뜻한다. 이런 양식은 당시 석굴암과 함께 창건한 불국사의 석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청운교, 백운교는 천상으로 가는 푸른 다리이며 그 위 좌측 종루에 새워진 석판과 우측경로에 세워진 팔각전은 석굴암의 팔각주와 같이 그 안이 보궁임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석판과 팔각주는 천상의 세계와 하계를 구분짓는 단편임을 상징해주고 있다. 문무왕이 창건하고 고려시대에 중건된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도 본전암이 들어갈 정도한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내전이 보궁임을 나타낸다. 이를 갓집이라 하는데 갓집의 천계는 석굴암 천장의 연화 대치함과 같은 뜻을 지닌다. 고요히 결과부좌한 자세로 오름한 두눈을 반쯤 뜨고 고해창탈을 굽어살펴 정좌하시는 본존의 위엄은 석불전체에서 풍기는 강렬한 분위기 속에서 더욱 신비의 깊이를 더해준다. 석실의 천장은 백여덟개의 벽석과 주먹돌을 교묘하게 짜맞춰 아치형을 이루고 있다. 연화무늬를 새긴 가운데 큰돌과 주위에 빗살처럼 그려 박혀져 있는 받침돌은 마치 부처님의 영광이 하늘로 퍼져나가는 인상을 준다. 천장아래 밑단에는 좌우에 다섯개씩 열개의 반원형 감실이 마련돼 있는데 그 안에는 다양한 모습의 보살상들이 봉안돼 있다. 이로 인하여 석굴은 더 깊고 넓은 인상을 풍기게 되며 벽면의 입체감이 살아나 이 굴의 장중함과 경계성을 더 한층 배가시키고 있다. 본존불을 둘러싼 아랫단의 저 상이 모두 입상이였던것과 달리 비해 감실 안에는 좌상인 보살상이 그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감실 보살들은 한결같이 기쁨에 넘쳐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할듯한 모습들이다. 이 감실보살들은 천장과 나한상에 중간에 위치하여 부처님의 뜻을 하계에 전하는 전승적인 사자임수를 띄고 있음을 보여준다. 감실 아래에는 좌우 다섯구씩 열구의 십대제자 입상이 조각돼 있다. 보살들의 감화를 받아 해탈된 이 십대제자상들은 고행을 참고 이겨낸 여유있는 채에 가사 한벌만 걸친 소박한 모습들이다. 그러나 아라한을 깨달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정확하게 어느 상이 과연 어느 제자를 나타내는가 하는 구체적인 단정을 내릴수 없으나 당시 신라인들이 마음속에 그릴수 있었던 십대제자의 모습이였을 것이다. 얼마 안되는 선과 단아한 형태로 이처럼 내면의 깊이와 신비를 표현해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신라인들이 종교적 경험이 심오하고 뛰어난 미의식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미와 추의 결합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경건한 침묵, 배움의 깊이와 힘이 나오는게 아닐까. 결국 그들의 모습을 아름다움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은 이들 제자상들에 나타난 길게 그린 선의 매듭에 신비. 조실 벽면 제자상 오른쪽에는 아름다운 몸매의 두 입상이 나란히 새겨져 있다. 우측상이 대범천, 좌측상이 보현보살이다. 평범한 큰 입상 위에 서 있는 대범천은 욕정을 벗어난 새끼 한알에서 아직도 욕심을 온전히 끊지 못한 천상계의 존재들을 위해 일자와 금강전을 들고 오직 정적만을 지킨 표정으로 하계를 굽어보고 있다. 왼편에 받든 금강전은 불가계의 지위를 상징한다.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새겨진 연화대를 사뿐히 즈려밟고 서 있는 보현보살은 실천적 후계자로써 사바세계의 중생을 교화한다는 그의 임무를 성실히 행하고 있음을 부처님에게 알리려는 듯 몸과 얼굴전체를 중앙에 본존불을 향해 돌리고 있다. 좌측의 철입상은 제석천, 그 옆이 문수보살이다. 땅을 중재하여 인간에게 부귀화귀를 내린다는 제석천이 든 종지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으로 아직 씻지 못한 중생의 먼지와 때, 즉 속세의 번뇌와 망상을 씻는데 필요한 도구이다. 오른편에 있는 지혜의 표상인 문수보살. 몸에는 구슬로 화려하게 장식된 천의를 입고 있지만 머리에는 원형의 소박한 두광을 하고 있다. 그는 반야경을 펼쳐 통찰하여 반야의 도리를 널리 설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손에 경부를 쥔 것으로 조각돼 있다. 불타란 지혜와 자비가 충분히 갖추어진 영원의 마음을 뜻한다면 관세음보살은 이 불타에 더할나위없는 자제력의 외적효명이다. 석굴암에서는 십일면관음보살이 본존불 바로 뒤 중앙에 종합해있다. 거대한 본존불 뒤에 수줍은듯 단아한 자태를 선보였지만 자연스러운 미소와 모든 것을 용납하는 듯한 따뜻한 눈길은 주위에 깊은 자비의 빛을 발하고 있다. 십일면이라함은 관음보살의 본얼굴을 제외하고 두부에 부과된 십일면을 말한다. 얇은 옷속으로 피어나는 풍만한 젊은 육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했것만 관능적인 흥분은 조금도 일으키지 않는다. 발 아래 흘러내린 천자락은 전신의 균형을 잡아주며 다 핀 연꽃속에서 금강초선을 뜻한 조용한 움직임을 나타내준다. 본존불 바로 뒤 경내를 향한 중앙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크고 둥근 돌을 새겨놓았다. 광대는 일반적으로 불상에 직접 부착시키는 것이 풍위인데 석굴암의 경우 광대를 멀리 후벽에 배치함으로써 그 거리를 말미암아 오히려 더 입체적인 추모감을 나타내고 있다. 원과 팔각을 기본구조로 해서 오각조로 안정감과 변화를 추구한 석연대는 거대한 본존불의 위엄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안정되고 굳센 느낌을 갖게 한다. 굴 내의 크고 작은 불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 모든 것이 움직이는 정지의 찰나를 영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촉지항마의 인상을 표현한 본존불에선 그것은 바로 도가 이루어져서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극치에 달한 그때에 생기는 불가사의한 승리자의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본존불 앞에 섰을때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 마음 속에 숨어있는 이 영원하고 지극히 복되고 자유롭고 깨끗한 마음을 끌어내도록 하는 일 외에는 더 중요한 일이 없을 것이다. 석굴암의 모든 다른 조상과 마찬가지로 이 본존불에서 우리는 한결같이 이 돌들이 이미 한낱 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며 돌과 사람에 마음 그 사이에 본연이 잉태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실로 석굴암은 인간에 대한 사랑, 예술의 영원성, 종교의 영광을 말해주기 위해 창조된 한국인의 영원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