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영화 대한뉴스의 산실인 국립영화 제작소가 발족한지 1991년 6월로써 서른돌이 됐습니다. 삼십년전 대한뉴스 197호에 수록한 내용을 강창선 아나운서의 그 당시 해설로 들으시겠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가장 현대적인 영화제작시설이 공보실 영화과에 마련되어 1월15일 그 낙성식을 거행했습니다. 중앙청 한모퉁이에 자리잡은 이 시설은 동시녹음 촬영장치를 갖춘 스튜디오와 최신식제작설비를 가진 본관 라보라토리 그리고 녹음영사실등 세채의 건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본관안에는 사무실과 자동현상기 등으로 구비된 동양최신의 라보라토리가 있으며 두개의 스튜디오에는 각종 촬영기와 조명장치가 마련돼 있어 천연색 시네마스커크를 비롯한 모든 영화의 촬영과 녹음시설이 완비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건축된 본관 건물은 ICA에 원조에 의한 대충자금 1억5천7백만환을 들여만든 것이며, 또한 지난해에 세운.
1960년대 초에 뉴스영화 제작과정입니다. 정부수립 직후, 공보처 공보국에 영화과를 설치하면서 뉴스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립영화제작소가 신설된 것은 1961년의 일입니다. 이보다 앞서 1957년에 당시 중앙정부내에 건평228평에 영화제작소 건물을 미국원조재단의 지원으로 신축하고 시라큐슈 대학 영화제작기술단에 기술지도를 받았으며 흑백 자동현상 장비도 설치했던 것입니다. 1958년 B스튜디오를 준공했을 때에 대한뉴스 174호.
발전하는 우리나라 영화제작에 크나큰 도움을 주게 될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1945년8월15일 해방과 광복의 새역사를 시작한 그날의 감격을 최초의 대한뉴스인 조선시보가 수록해놨습니다. 해외에 망명했던 민족지도자들의 환위. 해방된 조국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38선이 그어지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미군과 소련군이 남북한에 각각 진주했습니다. 그때의 서울과 농촌, 1948년 5월10일에 제헌국회의원 총선거, 해방3주년인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을 가졌고 이때부터 대한뉴스는 대한전진보라는 이름으로 매달 한편씩 제작, 상영했습니다. 신생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됐으나 38선을 지키는 옹진반도에서는 총대신 죽창으로 지켰습니다.
1950년 6월25일 북한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3년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됐습니다. 같은해 9월15일 UN군의 인천상륙작전, 9월28일에 서울수복, 10월에는 평양에서 우리정부가 북녘동포들의 열렬히 환영을 받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중공군이 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국군과 UN군은 한많은 흥남철수 작전을 전개해야 했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전쟁을 치루면서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소홀히 할수는 없었습니다. 서울에 이화여자대학을 포함한 여러 대학들, 그리고 중고등학교와 국민학교까지 피난학교를 개설했습니다. 그 당시에 서울은 유령의 도시처럼 음산하기만 했습니다. 휴전을 앞둔 1953년여름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여사가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장면입니다. 전쟁으로 중단됐던 대한전진보 대신 대한뉴스라는 제명으로 매달 한편씩 제작, 배포한것이 이 해 초부터였습니다.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포로교환이 있었습니다. 송환된 반공포로들 중에는 대전초기, 대전전투에서 실종됐던 딘소장도 포함됐습니다.
인기절정의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주한민군을 위문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다녀간 소식도 대한뉴스는 보도했습니다. 1956년 겨울 한강에서 벌어진 시민빙상대회에 출전한 시민들 중에는 넥타이를 매고 중절모를 쓴 신사복 차림의 선수까지 보입니다. 자전거 하이킹이 유행한 일도 있습니다. 지금은 볼수없는 서울거리의 전차모습입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있었던 전차는 서울역을 거쳐 노량진까지, 서대문, 영천, 종로, 동대문, 청량리까지 도남동, 창경원, 을지로4가, 원효로, 효자동까지 누비며 170만 시민의 발 노릇을 했습니다. 드럼통에 철판을 오려서 만들었을 망정, 우리손으로 버스도 제작해서 타고 다녔습니다. 6.25직후부터 등장했던 관광버스, 당시로써는 명물이였습니다. 1957년 무렵에는 시발택시가 등장했습니다. 이무렵 자동가마니틀을 고안해낸 사람이 제1회 발명상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라디오를 조립, 생산했고 라디오 연속극이 인기를 누렸습니다. 1950년대 말에는 동전이 나왔습니다. 추억속의 종로 야시장 거리. 1957년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오늘날의 미인대회와 비교해볼때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변모하는 유행의 발자취. 필터가 달린 아리랑 담배가 처음 선보인 것이 1958년이였고 이런 고급담배를 구하기가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대한뉴스는 이때부터 주간단위로 제작하게 됐고, 필름도 35미리 표준형으로 바뀌어서 매주 120벌씩 배포했습니다. 초복날에 광나루 풍경입니다. 그때는 한강이나 정릉, 세검정 계곡을 찾아 더위를 이겨내곤 했습니다.
1959년 8월에 제작한 대한뉴스 228호입니다.
서울시에서는 지난 4월부터 매달 두번씩 영화의 날을 마련해서 서울시내 시공간에서 우수영화를 비롯한 문화영화, 기록영화를 연속상영해 널리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날에는 매주 정기적으로 전국에 배포되는 대한늬우스 두편과 우리나라의 발전에 관련된 여러가지 모습을 수록한 기록영화 즉,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체육 여러가지를 엮은 영화와 그 밖에 재미있는 문화영화 등이 상영되고 있습니다.
그해 추석날 남쪽에 상륙한 사라호 태풍은 불과 이틀만에 살인적인 폭우와 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전국에 피해를 준 엄청난 재난이였습니다. 태풍과 함께 1950년대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변혁의 1960년대가 왔습니다. 315부정선거가 직접적인 원인이 된 419학생의거가 60년대 첫해를 장식했습니다. 419 일주일후인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 그의 12년 장기집권이 막을 내렸습니다.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윤보선씨를 대통령에 옹립하고 장면씨를 국무총리로 하는 제2공화국 정부가 탄생했습니다. 마음껏 누리게 된 자유는 방종을 가져왔고 장면정부 9개월동안 각종대모가 그칠날이 없었습니다. 이보다 앞서 허정 과도정부 시절인 6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해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6.25이례 도와준 감사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303호부터는 대한뉴우스라고 표기했습니다.
혁명공약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1위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그해 12월 서울남산에 KBS 텔레비전 방송국이 개국했습니다. 한명숙씨가 부른 노란셔츠입은 사나이가 한참 유행하던 때입니다. 5.16이후 재건 국민운동이 전개되면서 물자절약과 관련해 대한뉴스는 짧은치마 입기 계몽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962년 5월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제9회 아시아영화제입니다. 그무렵 대한뉴스 362호는 산업박람회 개막소식을 수록했습니다.
약진하는 이 나라의 경제부흥을 상징한 5.16혁명 1주년 기념 산업박람회가 박정희 의장이 개관 테이프를 끊음으로써 경복궁 넓은.
1964년에 도쿄 올림픽, 우리나라는 16개종목 212명의 선수단을 파견해 레슬링과 권투에서 은메달, 유도에서 동메달을 따냈습니다. 이때 남쪽의 아버지 신문준씨와 북쪽의 딸 신금단 육상선수가 14년만에 극적으로 만나기도 했으나 곧바로 다시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한뉴스는 자막을 개선하면서 새로운 의욕을 보였습니다. 66년 6월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프로권투 세계주니어 미들급 선수권 경기. 우리나라 김기수 선수가 이탈리아 벤베누티 선수를 이기고 첫 세계챔피언이 됐습니다. 1960년대 중반 월남전선에 우리 국군을 파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뉴스는 이때부터 월남전이 끝날때까지 줄곧 보도진을 파견해서 수시로 월남소식을 전했습니다. 1968년 121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있은후 4월에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습니다. 그해 11월 울진, 삼척지역에 100여명의 공비가 침투했을때는 향토예비군과 주민들의 활약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미니스커트가 크게 유행했습니다. 서울인천간 고속도로에 이어서 서울부산간 고속도로 전구간이 개통됨으로써 전국이 하루생활권에 놓이게 됐습니다. 70년대와 함께 고속도로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1971년의 크리스마스는 서울 충무로에 있는 대연각 호텔 화재사건으로 얼룩졌습니다. 이날 백예순일곱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72년 8월부터 대한뉴스는 천연색으로 제작해 35미리 백열벌씩 복사해서 전국공연장에 배포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 전개되던 때 였습니다. 대한뉴스는 이때부터 꾸준히 장비현대화와 인력보강을 통해 기술축적을 해왔습니다. 그 결과 1988년 제24회 서울 올림픽 대회에 공식기록영화를 우리손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고 세계가 칭찬하는 높은 수준의 영화를 계속해서 제작하고 있습니다. 1991년 6월 서른돌을 맞는 국립영화제작소는 우선 대한뉴스 흑백시대에 화제거리를 제1집으로 모았습니다. 천연색 시대 이후에 변천하는 모습은 제2집으로 엮어 다음기회에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