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처럼 터져나온 그 인파, 그 함성, 대한민국 만세.

해방과 광복의 새 역사를 시작한 그날, 1945년 8월의 그 감격.

광복과 더불어 제작하던 조선시보를 정부수립후에는 대한전진보로, 53년부터는 대한늬우스로 제작, 전국에 배포하였습니다.



그때그때의 우리생활, 우리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보도하고, 기록을 보존해왔습니다.

국토분단초기, 공장이 많던 북한과는 달리, 38선 이남에는 재래식 농촌이 많았습니다.

지역마다 닷새만에 하루씩 서는 오일장, 향수에 젖게하는 우리모두의 고향입니다.



악몽과도 같은 6.25전쟁, 동족상잔의 비극.

남부여대하고 피련을 가야했습니다.

겨울에는 대중가요에서 금순이도 울며 헤어진 흥남철수

한많은 1.4후퇴가 있었고, 서울은 또한번 유린당했습니다.

3년에 걸친 전쟁과 피난살이.



육체파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주한미군을 위문하기위해 우리나라에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주요간선도로에 전차가 다니던 서울,

그때의 인구는 고작 170만명 정도였습니다.



드럼통에 철판을 오려입혔을망정 우리손으로 버스도 만들어서 타고다녔고, 6.25 직후부터 관광버스가 등장했는데, 그 당시는 명물이었습니다.



국산시발택시가 등장한것이 1957년 무렵이었습니다.



여름날의 피서행락, 주로 한강과 광나루, 정릉계곡같은데서 수영복도 입지않고 물놀이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50년대말 추억속의 종로 야시장거리입니다.



서울시민 빙상대회를 수록한 1956년의 대한늬우스는 넥타이에 중절모를 쓴, 신사차림의 선수까지 보여줍니다.



자동가마니틀을 고안해낸사람이 제1회 발명상 대통령상을 받았습니다.

나일론옷이 한창 유행하던 때, 우리도 나일론 옷감을 짜내기시작했고,

국민건강을 위해 전국적으로 국민체조가 보급되었습니다.



문맹퇴치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서 대학제복의 학생선생이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1957년도 제1회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미인을 뽑는 기준도 지금과는 무척 달랐습니다.



아직 민속놀이의 테두리안에 있었던 씨름대회.



명동에 있었던 시범관에서는 뉴스영화의 날을 맞으면 대한늬우스를 보기위해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만원사례 표지판을 붙일때도 많았었습니다.



1959년 남부지방을 강타했던 태풍 사라호.

엄청난 인명과 재산피해를 냈습니다.



4.19와 함께 60년대가 열린 그해,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이 서울에 왔을때,

그야말로 환영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60년 섣달 그믐날, KBS텔레비전이 개국을 보면서 한명숙씨의 노랑샤쓰입은 사나이가 대중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루이암스트롱과 같은 세계적인 인기 연예인들의 방한공연이 있었는가하면은,

국민운동정신에 따라 대한늬우스가 짧은치마입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60년대 중반, 월남에 우리 국군을 파견하면서, 대한뉴스는 특파원을 종군시켜 수시로 전황을 보도했습니다.



월남에서 대한늬우스 박옥봉 특파원의 보도.



1969년 2월, 어린이들을 입시지옥으로부터 해방시킨 첫 중학 무시험 입학추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슬아슬한 미니스커트 바람이 크게 불었습니다.



서울-인천간 고속도로 개통을 시발로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좁혀놓은 고속도로시대가 열렸습니다.



71년의 크리스마스를 TV중계방송에 묶어놓은 대연각호텔화재.

무려 167명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부전자환이 없는 우리처지에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수출을 해야했고, 처음에는 합판과 함께 가발을 수출해 대중을 이루었습니다.

농촌부녀자들의 섬세한 손재주로 만든 가발과 인조속눈썹을 전량 수출해, 나라의 수출증대에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해마다 10월이면 진주에서 열린 개천예술제. 한우챔피언을 뽑는 한우 소싸움으로 관심을 크게 모았습니다.



문패달기운동을 벌인때도 있었습니다. 우편물배달을 보다 원활히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1회 우량아 선발대회에서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어린이가 튼튼한 어린이로 뽑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71년 남북적십자회담제의와 72년 74공동성명등으로 남북의 대표들이 평양과 서울을 방문하고 공연행사를 갖기도 했습니다.



해마다 봄철이면 넘어야했던 보릿고개를 잘 넘기기 위해서는 보리를 밟아줘야했습니다. 공무원과 학생들까지 참여한가운데 치루어진 농촌의 큰 행사였습니다.



70년대 중반 한때,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돼 단속대상이 되기도 했던 장발.



고로화입과 함께 1973년에 준공을 본 포항종합제철은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입국의 신호탄과도 같았습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면서, 농촌에서부터 시작한 새마을운동, 이때부터 대한뉴스도 천연색 뉴스를 제작, 상영했습니다.



74년에는 지하철시대가 열렸습니다.



자동차수출국대열에 오른 우리나라는 77년에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0억달러 돌파후, 7년만의 일입니다.



쌀이 부족해서 한때 생산을 중지했던 쌀 막걸리가 쌀 증산으로 인해 다시 생산, 판매되기 시작한것도 이때였습니다.



격동의 1980년대 벽두, 중고등학생들의 교복 자율화가 이루어 졌습니다.



해방후 37년만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습니다.



83년 여름, 온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킨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텔레비전의 위력이 어느정도인가를 실감하게 해준 큰 사건이었습니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를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3남지방 수재민들에게 북한쌀과 의약품이 전달되기도 했습니다.



88년 서울올림픽은 동서의 이념장벽을 깨고, 세계지역간의 빈부의 벽을 허문 대회로써, 당시 국립영화 제작소는 대한뉴스 수록과 함께 올림픽공식기록영화를 제작했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북한이 동시에 UN회원국이 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함께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조선시보로 출발한 대한뉴스는 그동안 몇차례의 변천과정을 거치면서, 정보홍보매체로써, 또한 역사를 기록하는 증인으로써의 소명과 사명을 다해왔습니다.

특히 텔레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이전까지 대한뉴스는 국내유일한 영상매체로써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국내에만 머무르지않고 우리의 국력이 뻗어나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세계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땀의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 국민에게 알리고 기록자로써의 소임을 다해온 대한뉴스.



이제 2000년대를 앞두고 세계화를 향한 뉴 미디어 시대를 맞아, 대한뉴스는 케이블 TV 공동채널인 KTV 한국영상으로 새롭게 태어나 여러분과 다시 만날것입니다.